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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r 05. 2022

비를 맞으며 춤추라

인생은 행선지를 신경 쓰지 말고 즐겨야 하는 여행 같은 거야.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해.

- 안가엘 위용, 『행복은 주름살이 없다』, 청미출판사     

  


아파트 단지 옆 가로수인 계수나무엔 노르스름한 물이 들기 시작했다. 은행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가을빛으로 스며들고 있다.



.

  

하지만 어르신 느티나무는 검은빛이 가득한 녹색 가지들을 쫙 펼치고 그 위용을 과시하듯 서 있었다. 꿋꿋한 모습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러니 안 물어볼 수 없었다.

  

“어르신, 어르신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나요? 400년 넘게 살아오셨으니 웬만한 것에 살 떨리는 일 같은 건 없으시죠?”

  

질문을 던지고 천천히 둘레를 걸으니 어르신이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없겠나? 몇 백 년 지나오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어왔지만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게 있어. 바로 기후 변화라네. 지금이 시월이지만 오늘만 해도 얼마나 더운가? 마치 9월의 늦더위 같지 않나?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어.


5월에 우박이 떨어지는 건 뉴스거리도 안 되네, 엊그제 안성과 평택지역에 강풍이 불고 우박이 떨어졌다니 믿기지 않네. 수확을 코앞에 두고 이런 일 당하는 농민들 일이 남 같지 않아. 나 역시 씨앗을 잘 거두고 자손을 퍼트리는 일이 행여 날씨 때문에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라네. 올해는 특히 여름에 비가 잘 안 와서 속 타는 날들이 많았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 가지들 사이사이로 죽어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나이 탓도 있겠지만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지.

  

그러나 어쩌겠나? 자네가 오늘 엽서에 써 온 문장처럼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나? 강풍이 불어오면 그에 맞서지 말고 오히려 잘 껴안아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한다네. 그래서 다행히도 태풍에도 가지들이 잘리는 일은 드물었네.

  

하지만 이런 걱정만 있다면 어찌 살겠나? 자네 같이 종종 찾아와 말 걸어주는 사람도 있고, 오늘은 바람도 한 차례씩 불어와 더위도 식혀주니 그럭저럭 견딜 만하네. 그리고 해가 넘어가면 제법 선선해져서 지내기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네.”   


400년 넘게 살아온 어르신 느티나무에게도 삶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데, 이제 60년도 살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어떠하랴. 더욱이 100년 살기도 쉽지 않은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니 폭우를 그치기 기다리다가는 삶의 종점에 다가가 있기가 쉬울 것이다. 그래, 폭우 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워서 인생을 즐기는 거다.

  

그리고 ‘행선지를 신경 쓰지’ 않고 즐기는 것을 못하는 나도 아니다. 숙소든 식당이든 예약해 놓지 않고 여행을 떠난 다음에 불쑥 찾아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다. 때와 상황에 따라 계획은 얼마든지 변경을 한다. 어찌 보면 줏대가 없어 보일 테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꾸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난 이걸 융통성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상록오색길 걷는 동안 한 번도 코스의 방향을 바꾼 적이 없는데 이날은 1코스 걷고 5코스인 본오들판길만 다녀오자 하고 집을 나섰다. 엽서에 써 간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문장 속 ‘행선지’는 ‘인생의 행선지’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볕이 뜨거워서 길을 걷기엔 무리지만 느티나무의 변화가 궁금해서 상록오색길로 나선 것이다.     



인생은 행선지를 신경 쓰지 말고 즐겨야 하는 여행 같은 거야.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해.

- 안가엘 위용, 『행복은 주름살이 없다』, 청미출판사     

  


14회까지 걸은 코스 방향은 매번 같았다. 1코스의 끝점인 느티나무에서 시작해 5코스로 역방향으로 한 바퀴 돌은 뒤 마쳤다. 세 계절을 꼬박 그렇게 돌았다. 그런데 코스를 바꾼 오늘 써 간 문장이, ‘행선지를 신경 쓰지 말고 즐겨야 하는 여행 같은 거야.’ 일 줄이야.

  

방향을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맨발로 걷기 위해서였다. 1코스가 가장 긴 4.6킬로미터인데 감사하게도 흙길이다. 요즘 맨발 걷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1코스가 끝나고 5코스에 들어서면 일부 구간만 빼고 나머지 구간까지 전부 시멘트 바닥이다. 그리고 1코스는 그늘이 많다. 그래서 1코스 끝 지점에서 되돌아와 흙길을 다시 걷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같은 우연의 일치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약간만 줄었을 뿐 걷는 시간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맨발로 3시간 정도 걸었더니 몸이 훨씬 좋아진 느낌이었다.

  

총 15Km의 상록오색길 걷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에 행로 변경할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날씨와 맨발걷기 때문에 경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나쁘지 않은 걸 보면서 가끔은 이렇게 돌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처음에 세운 계획이라고 해서 끝까지 그 내용으로 밀고 나갈 필요는 없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전 코스를 돌기로 작정했다면 나설 자신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문장이 나를 움직였다. 엽서에 문장을 쓰고 나자 더위 속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안 그러면 그늘 있는 뒷산으로 갔을 것이다. 문장은 그토록 쓰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발산한다.

  

인생을 계획대로만 산다면 무슨 재미인가. 가끔은 일탈을 하면서 짜릿한 맛도 느끼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 좋지 않을까? 그것이 원칙주의자에겐 불안하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원칙을 고수하기엔 요즘 시대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때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를 맞아도 보자. 그러면 내성이 생긴다.


우리의 뇌는 낯설고 새 경험을 할 때 새로운 회선을 만들어낸다. 비를 맞으면서 춤까지 추면 단단한 근육까지 만들어질 것이다. 말랑하고 건강하며 단단한 뇌를 만들어 보자.

(2021.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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