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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r 07. 2022

기다려, 나의 노년이여!

 

우리가 노년에 실제로 잘 잊어버리는지,

또 어떻게 잊어버리는지 하는 문제는

태도와 연습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 스벤 푈펠, 『나이의 비밀』, 청미출판사  


   

어르신 느티나무를 22일 만에 만나러 가고 었다. 요즘 아파트 뜰과 가로수에 단풍이 진하게 들고 있어서 얼마나 멋진 자태를 하고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래서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상록오색길에 못 가는 시간이 길어진 데에는 가지고 나갈 문장을 만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 남편이 집에 왔었다. 코로나19로 1년 10개월 만에 와서 같이 움직여야 할 일도 적지 않았고, 내 일상은 경로이탈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 한 번 이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다른 날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섰는데도 빨라진 걸음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느티나무에게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가지 끝 잎사귀들이 조금 말라 있는 정도이고, 아직 푸른빛을 날리지 않고 있었다. 먼저 안부 인사를 여쭈었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단풍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이군요. 저의 아파트 단지 앞에 두 줄로 서 있는 은행나무들은 벌써 노란 옷으로 바꿔 입었거든요.”

 

“어허, 그런가. 그래서 실망했나? 요즘 갑자기 추워졌지? 아마 일주일 전쯤이지? 전날까지도 반팔을 입던 사람들이 패딩을 입은 것이 말이야. 그래서 나무들도 겨우살이 준비를 빨리 시작했을 거야. 그리고 은행나무에겐 은행나무의 시간이 있고, 내겐 나만의 시간이 있다네. 같은 은행나무라 해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또 다르겠지.


내가 있는 여기를 둘러보게나. 작은 숲이지만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아직은 덜 춥다네. 낮과 밤의 기온차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아. 자네 아파트 앞은 낮에는 해가 많이 비쳐서 따스할 테지만 밤이 되면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꽤 쌀쌀할 걸세. 그래서 나무들이 겨울로 가는 준비를 더 일찍 했을 것이야.”

  

“그렇군요. 한편으론 다행입니다. 서서히 물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갑작스레 변한 모습을 볼까 조금 염려됐거든요. 그런데 오늘 제가 어르신께 묻고 싶은 것은 기억력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50이 넘으면서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나이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뇌가 노화되어서 당연한 것이라고요.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우리 뇌가 계속 성장을 한다고 하네요. 뇌의 노화도 그 사람의 태도와 연습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에요. 그래서 새 희망이 보이고 기운이 솟습니다. 저보다 7배나 많이 사신 어르신의 기억력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기억력이라…. 내 기억력이 점점 떨어졌다면, 내가 짓는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겠지. 봄이 아닌 여름에 싹을 냈다면 씨앗을 제대로 맺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네. 언제 싹을 틔우고, 언제 꽃을 피우고, 언제 열매를 맺고 또 언제 잎에서 물을 빼서 떨어뜨릴 것인지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나이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네. 태도와 연습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나? 우리 나무들에겐 그것이 생존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내 모든 감각을 세워서 날씨를 살핀다네. 내 삶에 열과 성의를 다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려나! 그것도 어찌 보면 잊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네 그려,”

 

“귀한 말씀입니다, 어르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길을 걸으러 가겠습니다. 오늘 걸음이 유난히 더 가볍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 mbrunacr, 출처 Unsplash


정말로 나는 간식 먹는 시간 빼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었다. 5시간에서 5시간 반 정도가 걸린 평소와 달리 4시간 반 정도로 마쳤다. 그랬음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걷기에 좋은 날씨였고, 그간 맨발 걷기를 해서 체력이 많이 좋아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이의 비밀》(스벤 푈펠 지음, 청미)을 읽으면서 한껏 고조되어 있는 까닭도 무시 못 할 것이다. 엽서에 적어가서 어르신 느티나무와 이야기한 내용처럼 우리의 기억력이 태도와 연습에 있다는 것을 책에선 과학적 데이터와 실험 결과 등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한 《비로소 나를 만나다》에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챕터에서 나는 점점 더 깊어지는 건망증에 대한 일화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그 원인이 노화에 있다고 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대부분 나이를 먹으면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치부들 하기에 나도 모르게 그리 판단해버린 것이다.

  

나이 먹으면서 뇌가 노화한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정확한 말도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우리의 뇌는 태어나서 고령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시냅스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데 뇌가 성장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젊은 뇌나 나이 든 뇌나 다르지 않다. 뇌의 신경세포가 분포되어 있는 회백질을 근육처럼 자꾸 써 줘야 성장한다는 것이 신경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이란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악기 연주를 배우는 등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등 말이다.

  

70세가 넘었는데도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공 언니가 있다. 엊그제 같이 식사할 기회가 생겨 여쭤보았다. 본인 스스로도 기억력이 좋다고 하시는데 젊은이 못지  않다. 간추려 보자면 공 언니는 순간순간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음미하듯 자신이 있었던 공간의 분위기와 느낌을 온 감각으로 느낀다. 그리고 밤에는 그걸 되새긴다. 책도 일주일에 2권 이상 읽고, 같은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는다. 읽고 난 뒤에는 한 줄 요약도 하고 중요한 부분을 되새긴다. 어디를 다녀왔을 때에는 그 장소를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하나하나 떠올린다. 가족 여행을 갔을 때도 새벽 5시경에 혼자 일어나 그 주변을 돌아보거나 갈 곳을 먼저 가 본다. 일명 예습과 복습을 이처럼 꼼꼼히 즐긴다. 그리고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운다. 캘리그라피 같은 것은 책을 사다가 혼자서 익혔다. 듣고 보니 역시였다.

  

《나이의 비밀》에서 말 한 이야기를 먼 곳도 아닌 바로 가까이에서 증명 받다니 실로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우리가 노년에 실제로 잘 잊어버리는지, 또 어떻게 잊어버리는지 하는 문제는 태도와 연습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말한 그대로가 아닌가.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겪었던 일들도 물 흐르듯 그냥 흘러가고 말 것이다. 학습 후 10분 후에는 50%가, 하루 뒤에는 70%가, 한 달 후에는 80%가 망각된다는 에빙하우스의 망각이론은 특별히 나이를 구별하지 않을 수 있다. 공 언니처럼 그 날 잠자리에서 뇌에 새기면 30년 전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양치질이나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깜빡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맞춤법을 헷갈리게 하는 기억력 등도 “갈수록 주의력이 산만해지며 잘 잊어버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반대로 자신의 기억력이 여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모든 방해요소를 이겨내고 사물을 더욱 잘 기억하는데 그 만큼 연습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그것은 그 단어를 잘 사용하고 있않아서일 것이다. 바로 어제도 남편과 통화하는데 중간에 하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가 하면, 이번에 본 남편 배에는 큰 보름달이 들어앉아 있었다. 요즘 중년과 노년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 남편 건강이 더 염려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볼록한 배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통화하면서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어젯밤에는 자려고 누웠는데 자기 배가 떠오르고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왔어. 정말로 자기 배 보니, 응, 뭐더라? 아, 단어가 안 떠오르네.” 그러고선 끊었다. 나중에야 생각났다. 바로 ‘심각해!’였다.

 

자주 쓰지 않는 단어는 이제 잘 안 떠오른다. ‘심각’이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만큼 심각한 일이 없어서 잘 쓰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토록 쉬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정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다. 우리말도 그럴진대 외국어라면 어떨까? 이제 영어도 굿바이, 바이바이 정도만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방법은 있다. 일상생활에서 폭넓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도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기억력을 훈련하지 않거나 날 때부터 아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쓴 책에 “나는 노인이 보물을 묻어둔 장소를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네. 노인들은 법정 출두일이라든가 채무자와 채권자 같이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억하고 있다네.” 라고 말하고 있다.

  

기억력뿐만 아니라 노년도 “어떤 생각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으며 누구든 자신의 노년을 개척할 수 있다.”는 푄펠의 말에 나는 많이 고무되어 있다. 우울, 질병 고독이 아니라 활기차고 즐거운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입에서 랄랄라가 터져 나올 판이다. 두려웠던 노년의 삶이, 그러니까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할머니’의 시간이 오히려 기대도 된다. 노년에 대해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 둘 알아가면서 용기가 생기고 있다. 내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노년기에서도 계속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새 일들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아니 평범한 이들도 태도와 노력, 연습에 따라 얼마든지 특별한 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노년이여, 기다려라!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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