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 2020) 서평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 윌리엄 포크너)
1979년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그 전달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빌미로 잡혀 의원직에서 제명된다. 김영삼은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호기롭게 장담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박정희는 그달 말 비명횡사했고 12월에는 전두환이 정국을 장악한다. 새벽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왔지만 어쨌든 오기는 왔다.
새벽이 오리라고 말할 때 김영삼은 비가역적인 시간을 믿었다. 크로노스로서의 시간. 시간은 거스를 수 없는 강물이며 역사의 물결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에 도달한다. 동트는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감각적인 은유건 간에 그 말을 할 때 김영삼이 전제하는 시간은 문학적이라기보단 역사철학적이다. 같은 시기에 김영삼은 다른 시간에서도 살았다. 카이로스로서의 시간. 김영삼은 말한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점이며 역사의 비극은 대부분 인간이 역사를 망각하는 존재이기에 일어난다.
영원의 과거 시제.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했다”. 유르착은 “사라지기 전까지는”이라는 조건문을 덧붙이지만 정지돈에게 그러한 조건문은 무의미하다. 정지돈은 말한다. 샹탈 에커만의 1993년작 〈동쪽〉은 냉전 종식 이후 동유럽과 러시아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애커만은 〈동쪽〉에 대한 노트에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사회주의 국가의 풍경, 얼굴과 거리 들, 기차역과 들판, 공장, 바람과 비, 눈과 봄기운 등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라는 말은 그녀의 시간이나 영화 제작 여건 등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시간은 역사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시간은 순차적이거나 진보적인, 인과적이거나 선형적인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며 오지 않지만 남아 있고 그러나 사라질 것을 예감하는 시간이다(사라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정지돈이 쓴 영원의 과거 시제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사라진다는 의미와는 다른) 무엇이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었던 샹탈 애커만과 달리 정지돈에게는 시간이 없다. 베를린 장벽은 89년에 무너졌고 소련은 91년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21년이고 잔해는 모두 사라졌다. 나는 프라하에 가고 헤프에 가지만 정웰링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다. 체코는 이제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관광 국가가 되었다. 정웰링턴의 목을 매달아도 프라하의 봄은 온다.
그러므로 소설을 써야 한다. 정지돈은 소설의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아주 가끔 의미가, 무언가 일치되고 연결되는 순간이 탄생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그것을 표현할 수단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남아서 존재하고 있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역사철학의 담지자인 젊은 맑시스트는 나에게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의사는 없는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오랜 세월 묵혀뒀던 트라우마가 불현듯 현실을 찢고 나오는 마지막 순간에 복받쳐 오르는 충격과 감동, 회한, 그리고 구원. 아직도 그런 걸 믿어요?
나는 믿지 않는다.
정웰링턴에 대해 정지돈은 아무것도 모른다. 정지돈은 자신의 소설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증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것도 아니며 감상에 빠지자는 것도 아니다. 정지돈은 다만 그때 그곳에 정웰링턴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독자는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통해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정지돈의 소설은 유능하거나 실용적인 글쓰기가 될 수 없다. 정지돈이 수많은 레퍼런스를 빌려 오는 것은 자신의 박학다식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차라리 불능을 수긍하려는 담담한 태도다. 그의 소설에서 시점은 분명하게 확정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정지돈의 소설은 큐비즘적이다. 글쓰기는 액체적이다. 시선은 다초점이다. 정지돈은 잠자리의 눈을 가진 소설가다.
리얼리즘의 추종자들은 정지돈의 불능을 무능과 무기력으로 읽을 수 있다. 젊은 맑시스트는 개체로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금욕주의를 요구한다. 쇼핑을 멈춰라. 기부를 멈춰라. 각개전투를 멈춰라. 그녀에게 정지돈과 정지돈이 좋아하는 소설은 1) 왜 이렇게 썼으며 2) 왜 이게 세계문학의 걸작인지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정지돈은 (아마도) 병행 정치의 가능성을 믿는다. 병행 정치의 목적은 세계와 투쟁하는 데에 있지 않다. 병행 정치의 유일한 강령은 용납할 수 없는 세계에 맞서 자신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 병행 정치는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정지돈이 좌와 우에서 모두 버림받은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와 현대 공산주의자 조디 딘을 인용하고 잇달아 자살해야만 했던 반스탈린 혁명가들의 목록을 나열하는 것은 공허한 자아를 대신할 우리를 요청하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으며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예술은 오토메이션 시대에 주체적 진리의 마지막 보루라고 최인훈은 썼다. 정웰링턴의 비참한 몰골은 『광장』의 이명준과도 퍽 닮아 있다. 맑시스트는, 그리고 맑시스트의 대척점에 있는 후쿠야마주의자는 역사를 직선적인 시간으로 이해하며 정웰링턴과 이명준으로부터 교훈이나 감상을 추출하여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그들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어쩌면 마르크스도 이를 알았을지 모른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참고할 것.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소실점에 맞춰진 초점은 세계를 왜곡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 믿게 만든다. 정지돈은 적어도 자신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알면서도 다가가려 한다. 그에게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소실점이 아닌 잊혀 가는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며 잔해조차 남지 않은 장소와 시간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원의 과거 시제는 그제야 현재와 미래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정지돈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계속해서 혁명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알린 소설이 「건축이냐 혁명이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이 혁명의 역할을 대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지돈은 건축도 혁명도 믿지 않는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어리석은 이지선다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달리 정지돈은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려 드는 사람보단 세계를 바꾸려 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지돈은 단지 소설이 쓰고 싶을 뿐이다. 소설은 인간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고 역사의 아이러니한 반복도 막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러나 망각되는 것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시도이며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기록의 고고학이다.
정지돈은 말한다.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라고. 그리고 정웰링턴의, 그리고 그의 동지들의, 그리고 그의 동지도 뭣도 아니었던 그의 민족과 이방인들과 그를 망각한 우리와 작가 정지돈의 불능은, 이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증명의 형식이다. 그것은 등장인물을 속이되 독자에게는 진실을 드러내는 하셰크의 소설보다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영원히 함구하는 카프카의 소설과 유사하다. 니콜라 레의 영화처럼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어느 지점에서 정지돈의 글쓰기는 소설의 가능성과 불능을,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이 그곳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진실은 영원히 그곳에 있다. 단지 우리가 망각했을 뿐. 모든 것은 영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