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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녹 May 22. 2023

내가 러시아에 간다고?

모스크바 인턴의 추억 1

무엇으로 글을 쓸지 고민하던 중에, 나의 옛날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려 글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쓰려고 읽습니다> (이정훈 작가)의 172~174페이지 부분을 읽다가 들게 된 생각이다.

(대략 지난 10년 간의 일기를 마음껏 써봐라는 내용이다.)


나는 2011년 9월부터 2012년 2월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왜 갔냐면, 거기에서 인턴을 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진행하는 <글로벌무역전문가 양성 해외인턴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시 나는 25살, 대학교 3학년으로 슬슬 취업에 대한 압박이 생겼고 휴학을 하고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도 슬슬 경력 없는 신입은 뽑지 않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었던 때였다.


그렇게 무역협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나는 6기로 참여했다.


당시 동기가 약 80명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꼼꼼한 서류심사와 면접, 영어면접을 거쳐서 뽑힌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사실 내가 뽑힐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뽑힌 동기들을 보자면 대부분 최소한 영어는 잘했다. 중국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의 능력자들도 꽤 있었다.

나는 제2외국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극소수의 동기를 보며 어찌나 위안을 얻었는지 모른다.


약 2개월간의 국내 연수 기간을 보내며 연수의 3분의 2가 진행될 때쯤, (이 기간에는 무역 및 비즈니스와 관련된 여러 교육을 받는다) 무역협회 인턴 담당 과장님과 희망 국가와 회사에 대해 논의하는 면담 자리를 갖는다.


당시 내 목표는 분명했다.


1순위: 대기업을 가거나. 2순위: 영어권 국가를 가거나, 대기업을 가야 나중에 취업이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대기업을 못 가도 영어권 국가를 가면 내 영어 실력이라도 늘릴 수 있을 것 같은 단순한 이유였다.


면담 내용은 대략 이랬다.

과장님: "에녹 씨는 어디에 가고 싶어요?"

나: "저는 현대종합상사나 대우인터 같은 대기업에 가고 싶습니다."

과장님: "대기업 계열은 희망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 (쩝...) "그래도 저도 가고 싶습니다."

과장님: "아, 러시아 있다. 모스크바. 괜찮겠어요?"

나: "네! 러시아도 좋습니다!"

과장님: "오케이~ 알겠어요."

하고는 인터뷰 종료.


나는 러시아를 단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었으며 러시아어도 단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러시아어인 '스파시바'도 나는 나중에 알았다.)


그런 내가 강하게 러시아도 좋다고 했던 이유는, 그만큼 대기업에 대한 희망을 강하게 드러내면 러시아가 아닌 영어권 국가의 대기업을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자기의 특화된 언어 관련 국가에 파견된다는 선배들의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내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2개월이 교육이 다 종료되어 가기 며칠 전 80여 명의 인턴들의 파견 국가와 회사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나는 도통 종잡을 수 없었지만 최소한 대기업은 가겠구나 하며 내심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내 이름이 불렸고,

"김에녹, 모스크바, 현대종합상사"

라는 과장님의 멘트와 함께 동기들의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뭐야, 러시아? 에녹이 러시아 말 할 줄 알아?"

"헐, 스파시바! 에녹아! 가면 스킨헤드 조심해야 해!"

"오~ 러시아~ 보드카 많이 먹겠는데?"


다들 남의 일 마냥(그땐 그렇게 느껴졌다) 한 마디씩 했고, 나는 사실 약간의 뇌정지가 왔다.

나는 내가 러시아에 갈 거라고는 사실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면담 자리에서 당당하게 "러시아도 좋습니다!"라고 외쳐 놓고는 내가 러시아에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한 생각이었고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놀랐다.


나중에 후문으로 들으니,

원래 매 기수마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최소 한두 명씩은 있는데 내 기수에는 하필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당 과장님도 러시아를 누굴 보낼지 고민하고 있던 중에 '러시아도 좋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웬 패기 넘쳐 보이는 놈이 있기에 "그래 니가 가라!"하고 보낸 것이다.


그렇게 나는 2012년 9월 2일,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모스크바로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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