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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녹 May 28. 2024

한 해를 시작하는 4월의 일본

4월의 오사카 (1)


일본 여행을 하기 좋은 시기를 추천하면 아무래도 봄, 가을이겠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4월이다. 4월 초는 일본 곳곳에서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꽃, 벚꽃을 일본에서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일본인들과 함께 벚꽃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이미 설렘 가득한 일이었다.


주말이 되면 벚꽃이 만개할 예정이라던 그 주의 수요일,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일본에 입국했다. 공항에서 오사카 시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난바로 가는 '난카이 특급 라피트(이하 라피트)'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저렴하면서도 소요시간은 조금밖에 차이 나지 않는 '난카이 본선 급행(이하 난카이 급행)'을 타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된다. 난카이 급행은 기차가 아닌 전철과 같은 내부 구조로 되어 있고, 배차간격 또한 라피트에 비해 훨씬 자주 있는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사카 외곽에 사는 현지인들도 오사카 시내를 왕복할 때 많이 애용하는 열차다. 나 역시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현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일찍 느끼고 싶어, 조금 느리지만 정감 있는 난카이 급행열차를 타곤 했다.


친구네 집은 난바 지역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걸어서 20~30분 정도 걸리는 '에비스초' 역 근처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난카이 급행열차를 타고 약 50분 정도 이동해서 '덴가차야' 역이라는 곳에서 환승해야 한다.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 속에서 일본의 작은 주택 마을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주거 형태가 아파트 또는 빌라지만, 일본은 대부분의 주거 형태가 주택 아니면 멘션 형태다. 그나마 도심지에서는 우리의 아파트와 비슷한 형태의 멘션을 종종 볼 수 있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주택 형태가 주를 이룬다.


열차 창밖을 바라보니 마을 곳곳에 만개 직전의 분홍빛 벚꽃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낙관적이고 희망 가득한 미래를 그릴 때, '핑크빛' 미래와 같은 말을 쓰고는 한다. 분홍색은 그러한 것이다. 괜히 보면 설레고 희망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오사카에 온 내 기분과 딱 맞아 든다고 생각했다. 봄에 벚꽃이 피는 이유도, 벚꽃을 보면 설레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도 반신반의였던 이번 오사카 한 달 살기는 왠지 잘 될 것 같은 핑크빛 기대가 생겼다.


설레는 핑크빛 벚꽃이 한 해를 시작하는 봄을 알리듯, 벚꽃이 만개하는 4월에 일본은 한 해를 시작하는 일정이 많다. 우리나라가 보통 3월에 초중고가 개학하고, 대학교가 개강하는 반면, 일본은 개학과 개강 일정이 대부분 4월에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간고사라는 팍팍한 일정이 있는 4월에 일본에서는 개학과 개강 시즌이라니. 벚꽃나무 밑에서 입학식이 진행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꽤나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일본의 만화를 보다 보면 학교 개학 또는 입학 장면에 벚꽃 배경이 종종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4월에는 개학과 개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일본 회사들의 신입사원 입사와 신입교육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오사카 도심으로 들어가던 때는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새까만 정장을 입은 무리가 삼삼오오 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 신입사원들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 수가 많아도 점점 많아진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신입사원 교육 기간이라 저렇게 함께 교육을 받고 퇴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수시 채용이 아닌 공채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대표적으로 한국과 일본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공채가 끝나고 적게는 수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동기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인다. 특히나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한국과 일본만의 독특한 조직문화는 이러한 제도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소속감과 일체감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조직문화를 대변이라도 하듯, 일본의 상당수 직장인들은 전형적인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컬러마저도 대부분 단조롭다. 흰색 와이셔츠에 새까만 정장. 우리처럼 네이비나 그레이 계열의 정장도 아니다. 우리로 치면 장례식장에서 상복으로 입을 만한 정도의 컬러감 없는 새까만 정장을 많이들 입는다. 특히 신입사원은 아마도 반드시 이러한 새까만 정장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인지 내규인지 싶을 정도로 전부 새까만 정장을 입는다. 11년 전 오사카에 처음 왔을 때, 길을 잃고는 지나가는 새까만 정장을 입은 직장인에게 더듬더듬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우연히 만난 그는 한국어 가능자였다. 그때도 궁금했던 터라 왜 이렇게 새까만 옷을 다들 입고 다니냐고 물었다. 그는 멋쩍어하며 신입사원 교육 기간이라서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그때 이후로 새까만 정장을 입은 앳되어 보이는 이들을 만나면, "아, 신입사원이구나." 하고는 속으로 생각한다.



밝은 얼굴로 수다를 떠는 신입사원들의 표정에서 10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10년 전 나 역시 신입사원이라는 이름으로 한창 어깨를 피고 가슴팍엔 사원증 목줄을 매고 다니며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새까만 정장은 아니었지만 네이비나 그레이 계열의 정장 또는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으며 "직장인이라면 으레 이렇게 입어야지."라고 나 스스로를 규정하며 살았던 시절이다. 직장원으로서의 삶만을 꿈꾸던 그 시절, 10년 뒤 내 모습은 한 회사의 평범한 과장 정도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정작 10년이 지나고 한 달 동안 글을 쓰러 오사카에 올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진부하디 진부한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리며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신입사원들과 함께 오사카 도심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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