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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녹 May 29. 2024

벚꽃이 뭐라고, 벚꽃에 진심인 일본인들

4월의 오사카 (2)


오사카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무계획 오사카 한 달 살기가 시작되었다. 하루의 일정은 그날 아침 정하거나 기껏해야 전날 저녁 간단한 검색을 통해 정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히도 한 달 살기의 첫 주는 오사카에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였다. 오사카에 오고 나서 최소 일주일 이상은 특별히 무엇을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매일 다른 장소에 벚꽃을 보러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국에서 벚꽃놀이를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벚꽃놀이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해야 하는 '물놀이'니, '단풍구경'이니 이러한 것들을 챙겨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낭만보다는 사람이 많아서 복잡한 것이 싫었고, 꼭 봐야 한다면 본격적인 시즌보다는 이른 시기나 끝물에 살짝 맛보기 정도만 하는 것을 선호했다. 4월에 오사카에 간다고 하니 다들 "우와, 지금 벚꽃 시즌이잖아. 벚꽃 많이 봐서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벚꽃 그게 뭐라고."라는 팍팍 메마른 감성의 혼잣말을 되뇌고는 했다. 그래도 4월에 일본에 왔으니 원 없이 벚꽃을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 절반, 책을 써야 하니 취재거리로도 좋겠다는 생각 반으로 바쁘게 벚꽃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일본사람들과 함께 동화되어 벚꽃축제(사쿠라마츠리)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은 조금 바뀌었다. 벚꽃은 꽤나 진심을 쏟아도 될만한 것이었다.


여러 벚꽃 축제를 다니고 벚꽃이 만개한 명소를 다니면서, 벚꽃을 즐기는 일본인들의 특징을 몇 가지 발견했다. 한 가지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삼삼오오 모여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벚꽃나무가 우거진 한 공원을 발견했다. 혼마치 역 인근에 있는 '우쓰보 공원'이라는 곳이었다. 목요일 오후 3시 정도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입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벚꽃나무 아래 돗자리에 둘러앉아 캔맥주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으며 벚꽃을 즐기고 있었다. 새파란 돗자리가 벚꽃나무 아래에 쫙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돈을 주고 자리를 빌리는 개념으로 보였다. 평일 낮에 이런 낭만을 즐기고 있다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일본인의 벚꽃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러한 벚꽃구경을 '하나미'라고 하는데, 하나미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 일찍부터, 심지어 며칠 전부터 미리 자리를 맡아놓는다고 한다.



다음 날 갔던 '조폐국'으로 가는 길에 있던 벚꽃나무 아래 잔디에서도, 그 다음날 갔던 오사카성이 보이는 '니시노마루 정원'의 명당 자리에서도, 돗자리 위에서 벚꽃을 즐기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동네에 있는 작은 놀이터나 공원에서도 그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벚꽃 시즌에 이처럼 벚꽃나무 아래에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맥주와 간식을 즐기는 것이 일본인들이 벚꽃을 즐기는 문화라고 한다. 실제로 벚꽃나무 아래에서 벚꽃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이 아닌, 일본 현지인들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벚꽃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였다. 우리나라에서 벚꽃 구경을 간다고 하면 벚꽃나무가 수없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구경하며 걸어 다니고, 벚꽃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 정도가 그려진다. 그러나 일본에서 본 모습은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벚꽃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고 오랫동안 관찰하는 것이었다. 특히 벚꽃 종류가 많기로 유명한 조폐국이나, 교토의 유명한 벚꽃 명소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훨씬 두드러졌다. 마치 전시회에서 미술 작품을 한 점 한 점 눈여겨 관람하듯, 벚꽃나무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이리도 저리도 살펴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의 벚꽃놀이는 걸어 다니며 벚꽃의 분위기를 느끼는 '동적'인 개념이라면, 일본의 벚꽃놀이은 벚꽃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정적'인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벚꽃 사진을 찍는 모습도 우리나라와 사뭇 달랐다. 우리는 보통 예쁜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진을 찍는다. 벚꽃나무와 함께 있는 나를 기념하기 위한 사진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사진 촬영 대상은 벚꽃 그 자체였다. 벚꽃 앞에서 서로 또는 자신의 모습을 찍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 모습이 일부 보였다면 그것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가지각색으로 피어오른 벚꽃을 카메라에 연신 담기 바빴다. 소위 '대포 카메라'라고 불리는 망원 렌즈가 달린 전문 카메라 장비도 종종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대포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 중 최소 70~80세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 대포 카메라를 찍는 할아버지들은 이후 오사카 곳곳의 사진 명소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들 곁에 서서 나 역시 살포시 각양각색의 다양한 벚꽃을 사진에 담았다. 어떻게 된 것이 벚꽃은 요리조리 아무렇게나 찍어도 예쁘게 나오는 '팔방미인' 같은 존재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벚꽃을 보러 다녔구나. 핑크빛의 벚꽃을 보며, 그리고 벚꽃을 바라보며 설레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벚꽃 그게 뭐라고."라고 되뇌던, 메말랐던 내 마음도 조금씩 촉촉해졌다. 생각해보면 벚꽃놀이가 즐거운 것은 예쁜 벚꽃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벚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즐거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벚꽃놀이에 와있는 만큼은 누구나 활짝 웃으며 돌아간다. 팍팍한 우리네 삶 속에서 모두가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을까. 내년 봄에도 꼭 벚꽃을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벚꽃 시즌에는 이 시기에만 판매하는 '벚꽃 콜라보 상품'이 인기를 끌기도 한다. 시즈널 마케팅을 잘하기로 유명한 스타벅스는 역시 벚꽃 시즌에 어울리는 특별한 음료와 함께 벚꽃과 관련된 다양한 MD 상품을 출시한다. 편의점에서도 벚꽃 무늬를 패키징한 다양한 식음료 상품을 볼 수 있고, 우연히 들렀던 맥도날드 맥카페에서도 벚꽃 시즌 전용 프라페 음료를 판매하고 있다. 다양한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의 나라 일본답게, 벚꽃과 콜라보한 다양한 캐릭터 굿즈 상품이 출시되어 있다. 이러한 벚꽃 콜라보 상품들은 단순히 벚꽃 시즌을 상징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벚꽃을 소재로 보다 친숙하게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기업들의 마케팅적인 노력이 아닐까 싶었다.



일본인들의 벚꽃 사랑이 이러하지만 사실 우리가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 황실의 국화가 '국화'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도 잘못된 이야기라고 한다. 그저 일본 황실에서 국화 문양을 쓰고, 일본의 벚꽃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꽃이 된 것이지, 공식적으로 일본이 국화를 정한 바는 없다는 것이 일본 외교부의 공식 입장이다.


벚꽃과 함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오사카성과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어우러져 보이는 '니시노마루 정원'의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풍성하게 핀 벚꽃나무 아래에 한 외국인 커플이 앉아 있었다. 남자친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여자친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스마트폰으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그 앞에 머물러 그의 연주를 잠시 듣기도 하고 그들의 모습을 살짝 카메라에 담기도 했지만, 그들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사랑의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라니.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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