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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녹 May 22. 2023

모스크바 외노자의 슈퍼마켓 비닐봉다리 사건

모스크바 인턴의 추억 3

그렇게 러시아에 배정받은 나는 그날로부터 약 3주 후 출국 일정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러시아는 꽤 난이도가 높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 이유는,  


1. 언어

나는 러시아 말을 전.혀. 못한다.(사실 다녀온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도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한다.

그런데 나도 영어마저도 잘 못한다.

고로 언어적인 문제가 당장 눈앞에 그려졌다.


2. 치안

당시 나를 두렵게 했던 것은 러시아 스킨헤드였다.

가기 전 주변 사람들의 말부터 인터넷 검색까지 온갖 흉흉한 정보가 있었다.

'스킨헤드들은 동양인만 보면 때린다더라. 심지어 죽인다더라.'

'러시아에서는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3. 인턴 중 나 혼자 가게 됨

80여 명의 인턴들은 전 세계 약 2~30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야말로 전 세계 각국으로 모두 흩어졌지만, 최소한 2명 이상이 한 나라에 배정되었고, 많게는 5명 이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로지 나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정된 한 형만이 해당 국가를 혼자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오는 막막함이 컸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단연코 언어 문제였다.


언어는 의외로 회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현대종합상사 모스크바지사에서 근무할 정도의 러시아인은 일단 영어를 곧 잘한다.

회사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소통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고, 거래처나 기타 업무로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어느 정도 영어가 가능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 일반적인 생활이었다.

일반적인 러시아 국민들은 우리나라 정도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즉 일반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은 어느 정도 영어를 구사하지만, 보통 시민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사실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한번은 슈퍼마켓에 갔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들을 다 골라 카트에 담고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계산대 줄을 섰다.

퇴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내 차례가 다가왔고, 하나씩 물건을 계산 벨트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삑, 삑,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조차 매우 긴장했기 때문에

물건을 고르면서 내가 지불해야 할 금액을 모두 계산기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계산대에서 내가 내야 할 정확한 금액을 미리 준비했고 그 금액을 캐셔에게 주었다.

아무 문제가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는 돈을 냈는데 갑자기 캐셔가 무언가로 말했다.


캐셔: "블라블라블라?"

나: "??????"

캐셔: (다시 한번) "블라블라블라?"

나: "엄.. 쏘리.. 아이 캔낫 스픽 러시안.."

캐셔: (약간 짜증스럽게) "블라블라블라?"

나: "아이, 캔, 낫, 스픽, 러시안. 노, 러시안"

캐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블라블라블라?"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내 뒤에는 줄이 한참이었고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 속에 온갖 생각이 뒤덮였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고 민망했다.

그렇게 결국 그냥 사려던 물건을 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뒤에서 어떤 여자 분께서 외치셨다.


여자분: "블라블라 백?"

나: (영어를 듣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무슨 백이라고?) "아임 쏘리?"

여자분: "플라스틱 백?"

나: "!!!!!!!!!!"


그렇다. 캐셔는 비닐봉다리를 구매하겠냐고 묻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재빨리 "다, 다, 다, 다"를 외쳤다.

(러시아어로 "다[да]"는 '네'라는 뜻이다.)

그제서야 캐셔는 싱긋 웃으며 비닐봉다리를 나에게 건네 주었다.

나는 부리나케 봉다리에 내 물건을 담고 그 여자분과 캐셔에게 "스파시바, 스파시바"를 외치며 그 마트를 도망치듯 나왔다.


그 뒤로 슈퍼마켓에 가면 늘 비슷한 "블라블라?"가 들렸고,

나는 기계적으로 늘 "다, 다, 다, 다"라고 답할 수 있었다.


이 별것 아닌 잠깐의 경험은 나에게 있어 잊혀지지 않는 러시아에서의 가장 당황스러운 기억이다.

지나고 보면 참 별것도 아닌 일인데, 해외경험이 많지 않던 나에겐 당시 너무 큰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짧은 필수 생활 러시아어 정도는 배웠을만도 한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러한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아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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