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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녹 May 22. 2023

모스크바 외노자의 지하철 정기권 구입하기, 실패적

모스크바 인턴의 추억 4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Eng), 출처: 위키백과



언어장벽과 관련된 또다른 일화가 있다.


당시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지하철로 약 2~30분 정도 걸렸다.

즉 매일 출퇴근 시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했다.

내가 살던 곳은 7호선(퍼플라인)의 Oktyabrskoye Pole역이었고, 회사는 같은 7호선의 Ulitsa 1905 Goda역이었다.

역으로는 3정거장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짧은 거리였다.


나는 정기권을 끊어서 다녔는데 보통 20회권이나 30회권 정도를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기권을 구입하는 자동매표기조차 없어 항상 매표소 직원에게 구입해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말을 하나도 못하는 나는?

현지 채용으로 계신 한국인 대리님 형님께 퇴근 길에 늘 부탁드리곤 했다.

그 형님은 당시 30대 후반 정도셨는데,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민을 와서 러시아어에 매우 능통하신 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해외로 장기 출장을 가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마침 내 정기권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형님은, "네가 가서 돈만 내면 끊어 줄거야! 걱정마."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또 슬슬 긴장이 됐다.

이미 지난 번 슈퍼 비닐봉다리 사건이 있은 이후였다.


퇴근길, 매표소에 가서 유리창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20이라는 숫자와 옆의 금액이 보였고, 그 금액을 메모했다.

정확히 기억 안나지만 예를 들어 456루블처럼 동전 단위까지 있는 금액이었다.


집에 가서 내가 가진 현금을 모두 털어 보았다.

당시 나는 슈퍼에 가면 지폐만 내고 거스름돈을 매번 받아왔기에 동전이 가득했다.

이 동전을 털어버릴 겸 정확한 금액을 내면 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음 날 출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으로 갔다.

늘 퇴근 길 회사 근처의 역에서만 구입했기에 출근길 지하철 역에서는 표를 구입한 적이 없었다.

조금 더 긴장이 됐다.

그렇지만 큰 문제가 없으리라 믿었다.

당시 러시아 지하철 역의 출퇴근 시간에는 늘 표를 사려던 사람들로 줄이 서있었다.

자동화가 아직 덜 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약 10명 정도의 줄을 기다렸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바보같이도 나는 20이라는 러시아 말 정도라도 미리 공부하고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냥 동전을 정확하게 내면 그 금액에 맞는 정기권을 당연히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준비한 동전을 한 움큼 제출하며, 손가락으로 브이와 열 손가락을 반복했다.

즉 20이라는 뜻.

그리고 손가락으로 동전을 가리켰다.

이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런데 역시나 조금은 불친절한 러시아 매표소 직원은 나와 동전을 잠시 쳐다보더니, 내 동전을 매표소 창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역시나 내 뒤에는 10명 가량의 줄이 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동전을 들이밀며 이번엔 핸드폰 전화번호에 20을 써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브이와 열 손가락을 반복했다.

하지만 매표소 직원은 영락없이 내 돈을 밀어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1회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 티켓을 구입했다.

그렇게 출근했다.


출근하니 구세주와 같은 대리님 형님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출국해 계셨다.

형님께 퇴근 길에 다시 한번 티켓을 사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아침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왜 그렇지?"하고는 마시더라.


퇴근길, 여느때처럼 형님과 함께 회사 근처의 지하철 역으로 갔다.

형님은 나에게 동전뭉치를 전해 받고는 매표소에 갔다.

그리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20회권 티켓을 받아 오셨다.

허탈했다.


그때 그 직원이 왜 기어이 내 동전들을 밀어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20회권 티켓이 없었나?

이렇게 많은 동전은 받지 않는건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든 구입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참 겁도 많고 소심했다.

별 것 아닌 일이 이렇게까지 기억에 나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큰 일이었다.

지난 번 슈퍼마켓 비닐봉다리 사건과 이 사건 이후 나는 크고 작은 생활 관련된 일들을 모두 러시아어를 잘하는 지인들에게 맡겨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운 일이다.

왜 그때의 나는 더 도전하지 못했을까.


글을 쓰다 보니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나는 많은 것들을 걱정한다.

조금만 달리 시도해보면 되는 일들일텐데 걱정부터 앞선다.

그리고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다.


지금 고민되는 일이 있다면, 그때 일을 떠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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