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듯이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기로 했다거나 의도치 않았지만 만남을 시작했던, 그 첫자리를 그려낼 줄 안다면 그 사이는 매우 특별해진다. 처음이라는 의미가 특별하기도 하고 기억한다는 게 기특해서 특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유일한 것을 소유했다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순간. 이 반복되는 찰나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줄 아는 사람은 그 날이 자신에게 놀라운 사건이었음을 매 번 스스로에게 확증한다. 화자의 이야기가 입술 사이의 공기를 밀어내어 시공을 갈라내면 머릿속 영상의 주인공도 더불어 흔들린다. 새로이 소환된 떨리는 기억에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다. '처음'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한번 평범했던 날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으로 변모한다.
우리에게는 이전에 일어난 일을 동일하게 반복되는 사건으로, 지금도 유효한 내용을 담은 사건으로 보는 관습이 있다. 이 오래된 습관은 해당 과거를 역사이면서, 동시에 현재 하는 사실로 만든다. 잊히지 않는 생생했던 체험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지속하도록 한다.
실제 과거는 일회성이지만 반복되는 비슷한 체험은 기억에 다양한 색을 입혀서 사건의 그림들은 도리어 풍성해진다. 때로는, 안타깝게도 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여전하다'에서 멈춘다. 이 변함없이 다채로운 상태는 곧 그 의미를 좇아 진리가 되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지는 지켜봐야 한다. 슬프게도, 자신의 삶을 관통해 거의 유일한 것이 된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지지받지 못한다.
세월호가 떠오른다. 4월 16일을 다시 마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이다. 모든 게 가라앉은 것만 같았던 날이 돌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날이 돌아, 삼 년을 채우며 세월호는 올라왔다.
그 날은 처음이었다. 믿었던 나의 세계가 처음으로 가라앉았다. 나를 규정하던 모든 세계가 나를 버렸다는 느낌. 곧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종교인으로서 말이다.
기독교, 즉 Christianity에 속한 분파를 자신의 종교로 삼고 있는 이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다. 성 금요일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와 로마제국에 위험한 사상을 행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된 날이다.
기독교인들은 고백해왔다. 그가 죽으신 이유가 지금 우리가 저지르는 과오와 무관치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삼일 만에 부활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와 용기를 주셨다는 신앙을, 오늘이 어제이듯 고백할 것이다. 올해 부활절은 일요일에 걸친, 4월 16일이다. 교회마다 모든 예배와 미사를 드리며 부활주일의 예수를 기념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곳에서는 그것만 기념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가장 낮은 자와 약한 자와 함께 하시던 예수가 그들 가운데 계실까.
교회에서 벗어난 지 꼬박 삼 년 째다. 일명 가나안 성도(거꾸로 하면, 교회를 '안나가'가 된다)라 불리는 존재로 살았으나 종교인이었던 자는 어쩔 수가 없다. 부활 기념일이 그날과 겹치는 것을 보며 그날 이후로 부활을 외면했으나 기다렸는지도 모를, 올라오는 간절함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감은 눈 사이로 두 손을 모은다. 종교인답게 신의 이름을 부른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를 믿음이라는 미덕을 찾아 부른다. 기적의 정박은 왜 이리 더딘지, 정의의 바람은 왜 방향을 자주 바꾸는 것만 같은지, 평화의 뱃고동은 아직 이 파도를 건너지 못했는지.
한 줌의 한숨이 빗장을 열어주길 바라는 소망을 타고 마음이 무너지던 처음의 장면이 떠오른다. 언제든 돌려봐도 영원토록 늘어지지 않을 비디오가 재생된다. 울고, 웃음 짓다 다시 울며 꼭 껴안고 싶은 그림이 마음 한편에 전시된다. 충분치 못한 그리움이 충분한 따스함과 향기를 풍기며 일어나기를 뜬 눈으로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