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힘
혼자 사는 듯한 세계엔 혼자 사는 이가 없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순간 세계는 의미를 입는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보며 우리를 보는 사람을 본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나름대로 노출증을 앓는다. 스스로의 시선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세계가 자신에게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어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지난한 외면이나 누군가의 맥락 없는 선택은 그렇게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요청하는 중이다. 나를 읽어주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재차 의미를 부여해달라고.
자신을 흔들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좀 더 어릴 때는 '역할'을 익히고 다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인정'을 먹여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타인은 나의 역할이 만드는 생산품을 챙기기만 할 뿐이었다. 정작 그들은 어느 것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역할에 심취한 나는, 나를 덜 챙기는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봤지만 언제나 타인은 자신의 것을 먼저 찾았다. 사랑이 나를 부정하고 지우는 일이라면 언제나 외사랑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자신에게도 부정당하는 나는 누구인가 생각했다. 생각이 매듭지어질 때마다 스스로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모르는 불쌍한 인간을 만났다. 불안해졌다. 아마도 나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타인을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먼저 나를 알기로 했다. 늦게나마 정체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기에 조금 기특한 생각을 더했다 여겼다. 나의 선의를 착취하던 그들도 나처럼 늦게나마 인생의 여행을 떠난 것이고, 때문에 의도치 않은 행동을 했었던 거라 자위하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이었다. 세계는 지나칠만큼 늦깎이를 용납하기 어려워했다. 본인은 이기적으로 변했다. 아니, 이기적인 사람이라 명명받았다. 주변인들은 나의 변화에 놀라워했고 이전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채워주지 않는, 더 이상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전이든 그 후든, 언제나 나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 말이다. 늦게 깨달은 잘못이었다. 공감과 인정은 자신을 찾으려는 이들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너에게로 가는 문
우리는 어떻게 '너에게 나를' 알려줄 수 있을까? 보여주는 것일까, 들려주는 걸까. 가만히 앉아있어야 할까 최대한 나를 내보여야 하는 일일까. 차라리 모두가 사색을 즐겨했다면, 아니 그냥 우리가 서로 '나에게 너를' 알려주려 했다면 말을 적게 해도 표정을 조금 바꾸어도 알아채지 않았을까.
벽의 존재 이유는 문에 있다. 벽을 뚫는 문은 이곳과 저곳을 통하게 하는 중간지대다. 사람은 종종 자신에게 이미 문이 있어서 언제든 열고 닫을 준비가 되어있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생각해보라. 문은 환대와 적대의 불안한 공존을 보장하지만 벽은 냉랭한 기류 그 외에 어느 것도 일으키지 않는다.
'너'라는 거울, 혐오의 프레임
타자의 존재로 '나'를 아는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너'와 나누는 대화에도 일부의 공감과 대부분의 무감, 그리고 일부의 반감이 섞여있다. 그래서 타자는 '다름'을 알리는 존재다.
타인의 시선은 내게 없는 것, 혹은 내게 있지만 인지하지 못한 일면을 밝힌다. 때때로 타인은 내가 지닌 다른 모습을 밝히기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타자는 마치 동화 속의 거울과 같다. 나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 그리고 거울 너머의 세계의 문. 혹은 반전의 경계다.
그러기에 혐오는 존재 자체를 혐오의 근거로 삼는 끔찍한 행위다. 살아있음을 혐오한다. 영화 <설국열차>와 <부산행>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기차의 시선'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외엔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혹은 살아있으면 안 되는 것)을 헤쳐나가 나만 살아남아야 한다. 때문에 영화는 경고한다. 그것은 하나의 틀일 뿐이라고. 세계를 가두는 짜인 틀일 뿐인데도 사람들이 이 틀을 세계라 착각한다고 말이다.
'나'라는 맥락, 탈혐의 프레임
프레임(틀)으로 읽으면 반복되는 사건들의 유사성에서 맥락을 발견하지 못한다. 차라리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하늘의 하얀 것을 구름으로 인식하듯이, 패턴을 이해하는 게 결과적으로 낫다. 틀은 마치 집과 같아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붕의 색깔을 바꿀 수 있을지언정 근사하게 지어 놓은 소중한 집을 두고 '바깥'으로 나오긴 쉽지 않다. 그곳이 그토록 바라던 '세계'여도.
때로는 일정 부분을 가두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로 만든 프레임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하나의 틀로 모든 맥을 잡으려 했던 오만이 오해와 불통의 원인이다. 서해안의 썰물을 보고 동해의 조수간만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맥락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 육안으로 보기엔 같은 물이지만 지나치는 땅의 모습을 따라 변화한다. 뿐만 아니라 토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다시 언급하지만, 차라리 패턴을 파악하는 게 훨씬 낫다. 존재를 근거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곧 혐오라는 생각을 기억해보자. 비슷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혐오가 아닌 탈혐의 프레임을 쓰도록 말이다.
오래된 그릇을 오래 비워두지 말자.
사족으로 붙이는 말이다. 전문분야가 아니어도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는 있지만 본인이 소속된 영역이 '말'과 '연단'에 관한 곳이라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연사는 충분히 배워야 한다. 머리 속에 스치는 느낌, 직관, 영감이 다 옳지는 않다. 의견을 내놓을 곳이 사람들의 모임이고 자신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진 곳이라면 더욱 검증해야 한다. 그 자리에 전문가가, 혹은 해당 분야를 더 잘 아는 이가 있다면 당신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와 미소에서 실망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비뚤어진 지식을 얻은 나머지는 당신이 서두른 분주함만큼 어리석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