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으로 살기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십 년 전 즘 동남아로 첫 해외여행을 갔었다. 비행기를 직접 본 적도 없었으니 해외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신이 나고 설렜다. 돌이켜보면 특이한 식문화, 금색 사원, 특유한 정취를 내뿜던 야시장의 이미지는 선명히 떠오르는데, 정작 돌아다녔던 여행지의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사람은 직접 보고 느껴야 기억한다는데, 여행이야 오죽할까.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니 지명 따위는 잊힐만하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불어오는 더운 공기에 숨이 턱 막혀 적도 부근으로 왔구나 싶었다. 더위를 식히려고 임시방편으로 손 부채질을 하면서 하늘을 봤는데 정말 맑았다. 넋 놓고 감상하다 '와! 이곳에도 하늘이 있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재미있는 말실수였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으니 말이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그 이후에도 재밌는 말을 많이 뱉었다. '와! 이곳에도 사람이 살잖아! 와 이곳에도 땅이 있어!'
다름과 같음
여행은 살아온 곳과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어서, 여행자는 떠나기 전에 사진이나 글로 정보를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 간접적인 경험을 미리 함으로써 다른 문화권, 언어, 사회제도에 익숙해진다. 이 기간에 여행자는 관광지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가 보질 않았으니 직접 본 적도 없는 곳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도착하고 나면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 부분이다. 생각지 못한, 예상과 다른 차이점이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실패해야만 얻는, 편견을 넘어 선 사람이 얻는 값비싼 고백이다. 깨달음의 시간이 몇 차례 지나가면 떠나온 곳에선 자주 볼 수 없었던 가로수 하나에도 신기해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 마주한 다름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하지만 여행자라는 '다름'의 신분은 조금 위협적이다.
타국에 도착하면 관광객은 이방인이 된다. 이는 관광객이 조심성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신이 현지인에게도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 아름다움은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동질감에서 나오는 감정으로, 이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불신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엔 분명 차이점이 있다. 피부색, 행동, 반응 모두가 다르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인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를 속이지는 않을까 불안하다. 그때 한 사람이 먼저 웃으며 밝게 인사한다. 의심을 풀고 상대도 손을 흔들어 답한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당신도 나와 같군요'라는 무언의 신뢰가 건네 진다. 타지에서 낯선 사람과 나누는 신뢰는 동질감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경험의 절대성
사람에게 동질감이란 소중한 감정이다. 동질감에서 얻는 안정감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심리적인 지도를 제공해주고 경험은 그 지도를 그리는 붓이 된다. 그러기에 경험은 언제나 옳다. 자신의 경험에 절대성을 부과하는 습관은 자신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공감하는 집단지성은 교육을 제공한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는 주전자는 뜨거우니 조심해야 해'. 아주 간단한 예이다.
이러한 '경험의 총체'는 당연시 여겨지는 공동체에선 별 다른 저항 없이 공유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뜨거운 주전자'처럼 대부분이 인정하는 이해와 달리,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경험도 있다 '무지개의 색깔은 나라마다 다르다. 이누이트는 색깔과 형태만으로 눈의 종류를 수 백개로 나눈다. 적도 근처에 사는 한 부족의 언어엔 명확지 않은 시간 개념 때문에,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분명한 동사가 없다'.
만약 무지개 색깔이 고작 세 개라고 하는 사람을 직접 만났다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 아니 무슨 생각이 먼저 들었을까? 만약 배경지식이 없는 채로, 내 눈으로는 똑같이 보이는 하얀 눈을 더 많은 개수로 구분하는 사람과 마주했다면 우린 대번에 지적했을 것이다. 설사 말은 꺼내지 못했더라도 우리의 반응은 십중팔구,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였을 것이고 이해 못 할 사람이라고 속으로는 툴툴거렸을지도 모른다.
차이로 생긴 해프닝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종종 에어컨의 온도가 적정한지에 관해 의견 다툼을 벌인다. 각자가 느끼는 시원함의 온도가 달라서 옷만 보면, 한 장소에 겨울과 여름이 공존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얼마 전에는 한 원피스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같은 원피스를 보고 '파랑, 검정이다. 아니다. 금색, 하얀색이다'로 각기 다른 주장이 나타났는데, 이 해프닝은 사람의 시각차가 말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례가 되었다.
눈이 빛을 얼마나, 또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바로 이 감도의 차이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나오고 나서야 '모두가 맞다'는 결론으로 원피스 해프닝은 끝이 났다. 해석, 즉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결정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색깔 논쟁'에서 보듯이 사람은, 자신의 이해를 너머 타인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선천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좋은 평론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해 보면 각자가 느낀 점뿐만이 아니라 줄거리도 다르게 말한다고 한다. 다른 이해가 다른 관점을, 다른 관점이 다시 다른 경험을 만들어 내는 재밌는 현상이다. 같은 영화지만 각자가 다르게 이해한다. 하지만 여러 관점을 보도록 훈련받은 평론가들의 눈은, 이와 달리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영화 평론가들의 글일수록 편협한 사견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영 후 작성된 짤막한 댓글에서 공감은 얻어도 평론가를 찾아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싶어 한다. 소모적인 댓글 공방에는 금세 피로해지곤 하지만, 이야기 전체를 조명해줄 뿐만 아니라 세세하게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주는 평론가들의 해설에는 감탄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기준선이 겹친다
다양한 관점을 지닌 평론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해의 폭을 넓혀가던 어느 날, 사고 회로에 문제가 생긴다. '경험은 언제나 옳다'를 기억하실 것이다. 이 경험으로 세웠던 옳음의 기준선들이 겹치기 시작한다. 조화롭게 존재하던 생각이 꼬인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더 복잡해진다. 설상가상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타인의 생각도 눈에 들어온다. 기준이 안팎으로 충돌한다.
'나'를 찾으러 떠났던 여행자도, 평론가들을 쫓아다녔던 영화광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너와 내가 사는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쟁과 사회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다르지 않다는 현실도 깨닫는다. '그래서 네 의견이 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 아직 답을 정하지 않았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다그치는 마음의 소리에 밀려 다 틀리다고 해본다. 다 옳다고 생각해 복잡해졌으니 다 그르다고 해본다. 그렇게 하고 보니 자신을 정말 부정하게 된다. 나를 이루는 내면을 부정했으니 그런 자신이 처참하다. 그런데 멈출 수 없다. 이미 눈을 떠버린, 그래서 많은 것을 봐버린 자신을 지키고 찾으려면 우선 다 의심해보고 하나씩 검증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옳음의 기준선을 하나씩 의심해보고 충돌하는 기준은 대조하여 검토해보려 애쓴다. 마침내 자신에 대해 확실한 것 두 가지를 정리한다. '나의 가치관이 생각보다 짜임새가 없구나'그리고 '나는 옳다고 믿은 것일 뿐이구나'이다. 기준선에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눈치를 챘다. 그런데 기준의 토대가 믿음체계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것은 옳다'는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 다가 아니다
'경험은 언제나 옳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제 이 두 명제가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결론을 내린다. '나는 나의 경험을 언제나 옳다고 믿는다'. 이럴 수가. 편협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도리어 나의 편협함을 발견했다. 고심한 끝에 내가 옳다 믿는 것이 누군가에겐 그를 수도 있겠다는 또 다른 기준을 세운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 것인가. 과연 옳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있는가.
난제에 봉착하고 만. 상대주의, 다원주의라는 끝이 나지 않는 거대담론을 꺼내야만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재미있을 수도,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을만한 이러한 담론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쉽게 생각해보기로 하자. '경험이 항상 옳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누군가는 옳다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텐데 각자의 입장을 상상해보기로 하자.
옳다고 말한 사람은 경험의 주체 입장에서 답했다. 주체에겐 경험은 항상 옳습니다. 펄펄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가 뜨겁더라는 경험은 옳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 사람이 틀린 것일까요?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이 사람은 타자로서 답했으니 말이다. 뜨거운 혹은 주전자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한 번도 주전자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겉면은 뜨겁지 않도록 만들어진 신형 주전자만 사용했을 수도 있다.
울타리 밖으로
다름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각자에게 다른 것인지, 집단지성으로 존재하는지, 우리 바깥에 있는지 혹은 우리 내면에 불변하는 동일한 기준으로 있는지'와 같은 거대담론에서 조금 떨어진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세상을 옳고 그름의 기준선 하나만으로 판단하기엔 보지 못하는 게 너무 많다는 말을 하려 한다.
기준선 너머로 시선을 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에게 경험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와 같다. 그러나 울타리가 공포와 편견의 울타리가 되도록 방치해두지 않아야 한다. 외부세계를 알려고 하는 노력을 멈추게 되면 편향하는 습관만 남기 쉽다. 자기 함몰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 세계관에선 자신을 포함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만이 선하다고 결정짓는다.
애정의 대상이 일반적인 소신들에 위배되는 영향력을 미쳐도 괜찮다고 말하는 세계의 사람은, 자기기만으로 대상의 상태를 파악하지를 못한다. 비합리적인 결정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이다. 울타리 안에 자신만의 또 다른 세상이 들어서게 되고 더 심각해지면 내면의 세상과 밖의 세상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인간은 내면세계를 지키려고 내면이 아니라 밖의 세상을 내면세계와 일치하도록 바꾸려 할 것이다.
울타리가 공포와 편견의 덩굴로 둘러싸이도록 방치하지 않으려면 울타리 밖으로 자주 나와야만 한다. 생각의 마당을 나와 우물가로 직접 나와봐야 한다. 그리고 더 걸어 나와 냇가에 앉아 물에 발을 담가봐야 무엇이 다른지 몸소 체험할 수 있다. 냇물을 자신의 마당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모든 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다만 강의 물을 조금 떠 올 수 있을 뿐이고, 먹을 물은 우물에 가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나그네의 삶
한 나그네가 우물가에 서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눈을 마주쳤는데 외국인인가 싶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번에 알아챘다. 이 고장에서 쓰는 사투리가 아니다. 게다가 구사하는 사투리도 어색한 것을 보니 확실히 아예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이 분명하다. 행동을 보니 물 한 그릇 좀 얻어먹을 수 있을지 묻는 듯하다. 이 사람에게 이 우물물을 나눠줘야 할까?
나그네의 길은 고단하다.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다른 마을을 전전하며 한 곳에 머물며 오래 쉬지 못하는 게 나그네다. 나그네와 비슷한 말에는 여행자, 여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조금 다른 어감이다. 나그네는 어딘가를 가려고 길을 나선 사람이다. 그러니 도착점이 어디이든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고단한 마음을 친구 삼아야 하는 이방인에 가깝다.
요즘 여행은 이러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여행의 여는 본래 '나그네 여'이지만, 요즘 여행은 여가의 여, 즉 '남을 여'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때문에 나그네의 고단함은 이제 여행자의 쉼이 되었다. 그러나 여행자나 나그네나 여전히 이방인이다. 관광지에 방문한 관광객이 제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그곳에 정착하여 오래 살지 않는 이상 현지화될 수는 없다.
그만큼 다름은 불편하다. 우리는 굳이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용기를 내거나, 우물물을 달라는 외국인을 내 마당까지 데리고 오는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을 위협하는 변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신도 가야 할 곳이 생긴다. 울타리를 벗어나 우물가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뒷산을 넘어 다른 마을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
나그네의 눈
인생을 종종 나그네의 길로 비유한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성찰이 담겨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길은 인생의 시작과 끝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지금의 일상이라는 과정도 포함한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현지인처럼 머무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나그네라 말한다. 다름을 마주해야만 하는 타자의 삶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다. 고향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고단한 마음에서도 말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때론 사람은 관광객으로 세상을 구경하며 평론가처럼 세상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이 나그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에서도 나그네라는 동질성을 발견한다. 그때 뜬 나그네의 눈을 억지로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누구에게나 우물물을 길어 올리기가 벅찬 날이 있고 서툰 말로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