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화가 나는 걸까. 단어 하나에, 목소리 하나에, 호혜로 가장된 예절 없는 행동에 이렇게 오래도록 울분이 생겨나서 가라앉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웃기지 않는 것에 겨우 반응하는 비웃음과 어느 것도 고르고 싶지 않게 자극하는 빈약한 선택지를 애써 거절할 침묵만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눈물도 아니고 폭발도 아니고 부들부들댐도 아니고 아주 강력한 표백의 욕구, 빗자루와 쓰레기봉투를 연상시키는 대상들이 무슨 이유로 이리 자주 심상에 비취는지를 이해할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비존재로 치부해버리고 싶다는 타나토스의 충동에 두려움을 느끼는 나, 이 프로이트의 망령을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막막한 미지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뱉어보는 일은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감정을 인식한 후 재해석하는 일, 나아가 감정을 조절하는 데서 감정과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두지 않는 감각을 일깨우는데 도움을 준다. 안타깝게도 감정에 관한 감정, 곧 두려움과 막막함 외에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어 그저 화가 나는 것이다.
2월 6일
짧은 심리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쩐지 기시감을 느낀다. 과학을 철학에서 떼어내기 위한 과학자들의 분투가 심리학계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현상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측정할 만한 도구를 만들고, 주장을 제시하되 그럴듯한 것만으로는 안 되게 하여야 하고 사람의 직관과 창의를 막을 수 없으므로 연역과 귀납의 조합인 가설 검증의 실험법과 동료 검증을 확보하는 모든 과정,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경험 과학으로 살아남게 된 심리학은 우리에게 줄기차게 겸손과 환대를 가르친다. 말 그대로 사람의 경험, 즉 현상학을 끊임없이 파악해야 하는 학문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직관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고, 심지어는 통계에서 빠진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조심스러움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형상이 비록 평균과 편차들에서 도출된다 하여도 각자의 경험이 출처가 된 지식에는 사람의 숫자만큼과 그 이상의 진리가 내포된다는, 가장 작지만 중요한 시작점을 매번 새로 찍을 필요가 있다. 학자가 부여한 의미는 살아있는 자를 대치할 수 없다.
건강한 삶과 마음에 관한 정의를 한없이, 데리다의 주장처럼 해체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학도 결국은 철학에서 독립하였으므로 경험 과학을 표방하면서도, 취사선택된 선전문구 같은 좋음이 있다. 그러므로 복지와 안녕을 위한다는 말 뒤에서 행해지는 여러 행동들, 즉 이미 알고 있다는 도덕적 우월감의 발현들과 매번 힘겹게 협상해야 하는 이들이 심리학자다.
2월 11일
고인류학과 인류학에 따르면 인류는 화식을 시작하면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단순히 날 것의 조각을 먹던 인류가 씹기도 편하고 소화에도 좋은 재질로 음식물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자, 현재로선 작은 병치레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잦은 소화불량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익히면 늘어나는 영양소들도 육체적 낭비를 줄이고 힘을 늘이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은 단순히 창의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간이 폄하해 온 자연과 동물의 파생물로써 기본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먹고사는 일에 관하여 아직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여러 수치와 양으로 개량까지 할 수 있는 지식을 얻었지만 그것을 모두가 얻을 수는 없게 한다. 농경이 시작된 지, 아니 불의 열기가 인간 세계를 데우기 시작된 지 무척 오래되었는데도 그 열을 적당히 나누는 것에 박하고 게으르다. 신에게서 불을 빼앗았다는 신화는 자신이 속해있는 자연과 애써 구별하고 싶다는 인간의 열등감의 발현뿐이었는지도. 인간은 사실상 동물보다 더 굶주려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식탁에 오른 것 중 어느 것 하나 타자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인간의 손이 닿아야 했고 불로부터 시작된 조작과 창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가공품들이지만, 생태계 안의 각자의 존재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생물체의 재생능력을 적절히 이용하여 치료를 진행하듯이 인간은 활용할 뿐, 이전부터 거기 있던 효과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하여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지식을 폄하하고는 고민과 사유를 저 멀리 밀어놓는 사람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은 평온한 식사와 그곳에 언제나 있어야 할 식탁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매우 오래전부터 함께 먹던 이의 얼굴에 불을 들이대며 마치 신의 이름을 흉내 내려 해왔던, 많은 약탈자의 그림자를 일렁이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