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쓴쓴 Feb 03. 2022

깊어질수록 넓게

길러지는 것들과 적셔지는 것들

1월 21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의 답을 생리적인 것을 기반으로 한 심리적 욕구에서 찾으려 했던 전통 속의 학자들은, 가장 먼저 자율성을 주목하였다.

자율성이 확보될 때라면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자신의 본질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이 무슨 순환 논증 같은 말인가,라고 말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경험적 지식으로 세워지는 학문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너무 자명해서 넘어갈 현상을 굳이 설명하여서 다시 당연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어제는 지도교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학문이 과연 현상을 담아내느냐, 와 같은 의문이었다. 경험 과학이라 불리는 영역의 이 이론이 우리의 실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자율성이 확보된 상황이라면 인간은 내면의 동기를 갖고 스스로 "자연스레" 움직이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돈과 이익이 되는 물품이라는 외적 동기 앞에서 다소 자율성을 잃게 된다. 이는 자신이 통제당했다는, 자신이 더 이상 행동의 "원천"이 아니라는 기분을 허락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시행했다는 것이다.

이 실험들은 인간을 말해준다. 인간은 자율성의 상실을 감내하고서도 "기꺼이" 얻고자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문은 무엇이 더 낫다고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된 욕구를 꺾는 것들에 관하여서는 말할 수 있다.



1월 26일
무자비한 환경을 딛고 진화해 온 생물군 중에서도 힘이 약한 까닭에 상상과 연대감의 발달과 같은 독특한 방식으로 적응해 온 인간에겐 지독한 열등감이 있다. 연대감 뒤에는 생존 욕구가 있고, 이타심 뒤에는 인정 욕구가 있다. 어떤 존재로부터 쓸모 있다고 평가받아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서글픈 존재다.

생리학적인 욕구, 곧 본능이라고 이해되는 생존에 관한 욕구로 인간의 마음을 서술하려던 프로이트의 주장도 그러기에 생각 외로 단순하다. 일하고 사랑하라. 생존하고 생존할 만하다고 인정받고, 서로 보듬어주라. 그게 잘 사는 것, 행복이다.

인간은 불안하다. 끊임없이 판단을 내려서 구획화하고 무엇이 이득이고 해가 되는지, 나를 지지해 줄 세상인지 구분한다. 의미는 그렇게 탄생한다. 최근 우리에게 돈은, 경제적 가치는, 그렇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직관적 숫자일 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을 의미 있게 만드는 설명이 되었다.

대신 심층적인 이해와 사유의 대상은 심오한 관념으로 바뀌고, 다가서기 어려운 것이라는 불평을 온몸으로 감내하게 되었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진 대상은 오해받고 삭제되고, 거세되어서 존재의 자리를 잃는다. 세상에 없는 것이 된 많은 유사한 생물군은 발현된 열등감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된다.

그것이 인간이든, 다른 종이든, 상관없다. 나의 열등을 지워줄 수만 있다면 끌어다 쓸 것이다. 자아의 빛이 강해질수록 그림자가 짙어질 거라 경고했던 융, 인간의 열등감을 사회적 활동에서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아들러.

어쩌면 인간 발전을 위해 투자된 과학이 인간의 열등감을 건드렸을지 모른다. 발견된 인간 고유의 정체성, 그것은 사실 없다는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론이 반동을 일으킨 것이다. 어둠을 거두었더니 인간 내면에 도사리던 태곳적의 어둠이 드러나버렸다.



1월 29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까진 낙서 정도. 스케치 노트 위에 직선과 곡선을 잇다 보니 저학년 초등학생 때 배우던 한자가 생각났다.

한자는 예쁘게 잘 쓴다는 말을 나름 들었었는데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한자는 획수가 정해져 있다.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차분히 몇 개월을 따라 쓰다가 방향과 순서의 규칙을 알아차리면 자연스레 질서 속에서 내 필체를 구사하게 된다.

아쉽게도 그림은 그렇게 배우질 못했다. 낙서가 죄가 되던 학습 분위기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사시대부터 인류에게 주어졌던 그림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는 좌절되곤 했다. 그러나 낙서와 그림은 경계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어릴 때는 몰랐다. 게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좀 그린다던 동급생들이 미술 다움이라 불리는 선들의 세계에서 쫓겨나는 것도 보았다.

나름 정밀묘사는 할 줄 알았다. 그게 스케치여야만 했고 색채가 더해져야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왜인지 눈으로 관찰한 것을 그대도 옮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빠르게도 대강도 그리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물감을 사용하는 방법도 익히질 못했고, 내 영혼은 미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욕망에 가까운 소망 같은 것이 있다. 가끔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고는 잊기를 반복했다. 단어로 분절된 세계, 개념과 정의로 반복되는 활자와 논리의 세계, 상호 주관과 관찰로 명징해져야 하는 과학과 학문의 세계에서 가끔씩 얇아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선들의 세계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구가 다시 오랜만에 나타나자 이번만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느꼈다.

이전 07화 오랜 정체로 흘린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