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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Mar 17. 2022

두려움은 예측하게 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들에 관하여

2월 18일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으로 소개되는 간절함이 있다. 양육이란, 사람의 자람이란 그만큼 어렵고 도움을 요청하고 선뜻 받아들여야만 이뤄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람으로 살고 사람을 키우는 일은 어느 동물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은 내재된 유전자의 명령만으로는 탄생 이후의 삶을 이어나가기에 부족한 능력을 지녔다. 태어난 이후 주기적으로 사회성을 자극받아야만 인간으로서 살 수 있고 관계 속에서 의존과 독립, 통제와 자율을 오가며 서로에게 거울에 맺힌 상이 되어줘야 한다. 인간은 자기상의 형성과 존속마저도 타인에게서 빌려오도록 진화했다.

가족의 해체 및 가치 폄하와 가족 속 아이들에 관한 언급을 마주할 때마다 자주, 우리에게 마을이란 것이 있는가 의심했다. 그것은 이제 고을과 같은 단어가 아닌가 하고 정말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있는가 반문하곤 했다. 모여사는 곳에 사회가 존재하는지 생각해보고 도움을 요청하면 선뜻 받아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가 생각했다. 그러고는 우리는 언제부터 인간됨을, 양육을 멈추었을까, 또한 언제부터 자라기를 거부했을까를 슬퍼하였다.



2월 26일(1)

세계에 벌어지는 일들이 심상치 않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나 다름이 없다. 세상은 항상 변화를 내재하고 그 변화는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위협일 경우가 많았다.

큰 비극이 여기 있다면, 심상치 않은 일들을 통제하려 노력한 인간의 손이 심상치 않은 일들을 만들어낸다는데 있다. 변화는 소멸하지 않고 순환은 악으로 치닫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선악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덜 악한지를 더 쉽게 생각하고, '비교적 선'하다고 믿는 일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행히도, 동시에 불행히도 악은 도처에 있다는 것을 인간은 반 세기 전에 알게 되었다. 전범들을 법정에 불법으로라도 세우는 데 성공한 한 국가의 연단들을 주목한 학자는 우리에게 사람은 사유하지 않는다면 악으로 빠지게 되고, 사유할지라도 언제든 악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처음 꺼냈을 때 자신이 속했다고 여겨진 민족의 국민들에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찌 되었든 그런 방식으로 악마는 참수를 당했고, 세계 밖으로 쫓겨났다(그리고 이 문장을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인간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가 될 것이다).

이처럼 느리고 지난한 방법으로 우리는 겨우 선과 악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이분법은 질 나쁜 이해 방식이고 실재와는 멀다고 배우긴 하지만, 또한 그것이 어른의 이해라고 믿지만. 그러나 과연 인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기가 아직 어려운 듯하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지라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교적 이롭고 각 존재를 해하지 않는 이상적인 가치를 선으로 상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선은 각자의 머리에서 나와 모두가 눈을 들어 따를 만한 것이면서 다시 각 사람의 몸에게 적용되는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 상상은 현실에 적용되어야 하고 본인이 아니라 타인에게 닿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전쟁을 옹호하는 누구든, 전쟁을 준비하자는 사람이 누구이든 거기에 선이 조금이라도 숨겨져 있다고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과거의 망령을 불러낸 강령술사와 함께 언명을 받은 이를 땅에 눕히고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라는 축복을 내리는 것이다.


2월 26일(2)

가해자를 악마화하는 것만큼이나 피해자를 영웅화하는 일은 인간적이다.

그러기에 바라기로는, 위기를 다루는 인간의 성향과 그로 나타나는 보편적 행위가 더 이상 그것은 아니게 되었다고 훗날 반박되길 바란다. 그러나 문화의 공진화는 더디기만 하다.



3월 6일

유사해 보이는 부정적 감정 모음 중에 가능한대로 빨리 해결해야 하지만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항목이 있다면, 화와 짜증인 듯하다.

감정은 본디 더 오래된 진화의 산물이기에 몸, 즉 생리적 및 즉각적인 반응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부정하거나 억압하면 언제고 다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감정은-일종의 욕구 만족 혹은 결핍-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인정받고 수용되어야 소화가 된다. 간혹 사회생활에서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는데, 결국은 자신이 감정조절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어린 시절에 누군가가 혼란스러운 내 감정을 읽어주고 설명해주었더라면, 청소년일 때 나의 말을 누군가 들어주기만 했더라면, 이라고 아파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사회적으로 성인 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본인의 감정을 인정하는 노력과 방법을 수련해야만 한다.

노력의 결과는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특히 화의 영역이 그러한데 이는 마치 매운맛, 타오르는 불과 같은 것이어서 주위를 불사르고 존재를 도망치게 하고 남겨진 것이 얼마 없게 만든다. 성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화를 분출하면 일시적으로 후련하다 할 수 있어도, 남는 것은 재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관계를 피폐하게 한다. 너무 잦은 화는 실제로 화를 일으키므로 적절한 자기주장이 요구된다.

근래 들어 본인은 짜증을 고민한다. 묻어나고 잘 씻기지 않는 먼지, 흙, 끈적이는 무언가인 이것의 특징은 화의 속성과는 다르다. 짜증이 한번 나타나면 주변의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라붙는다. 대상의 이전 모습을 왜곡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기분을 지속적으로 상하게 만든다. 이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유지된 채로 오해와 찝찝함이 재생산된다.

글을 왜 쓰는가, 고민을 하다가 최근에 내 글에서 묻어 나오는, 애써 냉철함 뒤에 숨은 짜증을 보았다. 사실만을 담겠다고 감히 자부하던 만족과 검열 사이에 무표정의 얼굴이 여기저기 끈적이를 묻히고 언어들 사이에 똬리를 틀었다.

마음이 기존 글에게서 거리를 두고 화를 거두고 짜증을 그만두게 하려면, 애써 다른 글을 써야 한다고 추측하지만 묻어나는 것을 털어내는 다른 글이란 무엇인가 묻는 데서 그치고 마는, 잦은 근래의 순간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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