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아닌데, 다가올 것보다 지나쳐온 것에 더 가까운 계절 같은 시리고 아픈 죽음들이 만연하다.
아니, 더 가까운 같은 것은 없고 더 가깝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사람들이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본인도 피곤해진다고 한다. 맞다. 정확한 느낌이다, 피곤함이란. 그러나 피곤이 가져다준 거부감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정말 옳은 것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많고, 그들은 언제나 피곤을 경험한다는 데까지 나아가다가 멈추고 만다. 그 말은, 거부감이 드는 많은 사람들은 항상 덜 피곤하며 간혹 불편해한다는 말이다.
지금 누리는 모든 권리가 당연하지 않다 여긴다면, 누군가가 주장하는 권리에 귀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공감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단 한 번도 무엇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누군가 이미 얻어낸, 누군가 지금 얻어내는 중인, 누군가에겐 아직인 권리를 당연하게 누려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배움이란 지나친 호사일까.
조금은 덜 불안한 사회이기를. 생명을 던져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낙후되고 열악한 사회가 이제 그만 개선되고 나아지기를. 그러나 여성의 날에도 슬픈 이야기는 계속된다.
3월 10일(1)
언젠가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걱정되던 짜증이 대부분 화와 분노로 변모했던 때였다고.
3월 10일(2)
나는 그 짧은 시간 내에 좀 더 상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 누군가의 승리를 보면서 본인을 대표할 이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희망이라는 이름 위에 덧붙인다.
대표자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들은 길게 늘어진 끈 위에 맺힌 매듭과 같은 것이다. 매듭은 가장 두드러지지만 끈의 일부분일 뿐이고, 매듭을 만들어주는 것은 나머지 부분이다.
다시 말해, 대표자는 우리 모두를 대변해낼 수가 없다. 끈 위에 놓인 수많은 점들이 그 사실을 반영한다. 물론 너무 멀리, 강하게 묶인 것은 많은 슬픔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측하기 때문에 두렵다.
다만 '나'라는 존재는 그 선 위에 놓인, 어떤 대표자와는 겹치지 않는 점으로서 '나 스스로'의 대변자가 된다. 결국 나는 특정 인물로 대표되는 점들 사이의, 수도 없는 존재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수직선만이 아닌, 평면을 함께 만들어내는 수평선, 나아가 꾸준히 뻗어나간 가지가 만들어낼 무수한 공간을 상상한다.
3월 11일
조심히 주위를 돌아보면서 뚜껑이 열린 오늘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통계의 함정에는 집단에서 나타난 특성을 개인에게 부여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20대니까, 60대니까, 여자니까, 남자니까, 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여론조사에서 채택된 과반의 혹은 최다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 몇 장면을 마주쳤다.
와중에 담담히 현실을 마주하는 여성분들의 글을 읽었다. 알 수 없는 고요함 혹은 약간의 울렁임.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일까. 마치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듯이 오후 반나절을 꼬박 들여 고민해보았다. 그리고는 이전부터 그분들이 말해오던 말들이 떠올랐다. "다를 게 없다."
그분들에겐 이전과 별 차이가 없던 세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여전히 너무 참혹하고 두려운 곳이면서, 굳건히 버티고는 변하지 않는 거인의 세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크게 변하는 것이 없을 거라는, 어떤 혐오의 다른 방식일 뿐.
그러므로 같은 색깔이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다른, 너무도 극명한 두 색깔 중에 고르기가 그리도 어렵냐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담담히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단지 정오와 저녁의, 동일한 하늘색이었고 그것은 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삶은 여전히 흐르고, 돌봄과 연대는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달라질 세상은 아직이지만, 함께할 준비는 이미 끝마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잠시 흔들릴지라도 누구보다 그것뿐이었다.
3월 12일
나는 역사가 말한 광복 이후의 시대를 산다. 이 시대의 배경은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하고,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은 앞을 향해 걷는다. 아쉽게도 나는 결코 배경, 즉 등 뒤의 것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러지만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 견해는 거기에 더 가깝다. 배경을 지고 걸어오는 운명은 무색무취의 자리에 본인과 어울리는 색과 향을 입힌다. 자리에 앉은 이보다 배경에 놓인 자리를 봐야 이해하기가 쉬울 때가 있다.
오래전 역사 속 인물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걸라 그랬다. 난 그렇게까진 못하고 안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배경에 맞춰 선택한 것일 테고, 현재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용기이지만 나에겐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첫 어구, 이익을 보면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배경이 탐이 난다. 그 격언이 좀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