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저 혼자 커온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더 있나 싶다. 홀로 섰다 믿는 이들에게 더 주는 일이 공평하다 말하는 곳에서는 봄도 의미가 없겠지. 꽃은 벚나무를 증명할 일이 없으니.
4월 22일
지구의 날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지구는 인간보다 어쩌면 오래 남을 것이니까. 하루라는 것도 감사라는 것도 지구적 관점에서는 거추장스럽다.
자주 인간사회의 결과에 낙관하기가 어렵다. 지구가 인간을 버티질 못하거나, 인간이 서로의 목을 조르거나, 둘 중 하나로 마지막 날이 당겨질 것 같아서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날의 지구에는 곧, 역설적으로 인간의 날이라는 게 필요할지도.
그럼에도 누구의 말처럼 나도 뭔가를 심어야겠다.
5월 23일
맑은 날만이 하늘이 아니듯이
하양의 푸름만 하늘색이 아니듯이
파란 하늘만을 푸르다 안 하듯이.
그래도 괴로워
담은 높고, 나무는 높고
하늘은 높고.
작은 난 어쩌다
저런 마음을 두어서
저녁의 푸른 하늘에도 슬퍼하나.
6월 5일
박물관에 가면, 사람이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해진다. 갈아서 만든 돌칼과 떼어서 만든 화살촉으로 시작되는 인류 폭력의 현장이 청동과 유리, 금과 은 같은 재료와 병렬하여 놓여있다.
읽히는 풍경들이 있다. 우리는 오래, 평생을 분투하는구나. 싸우고 죽이고 복종시키고 빼앗고 지키다 약탈당하고 죽는구나. 권력을 위해 일하고 굶지 않으려 애쓰다가 영원하지 않은 인생을 슬퍼하며 돌과 금에 자신을 새겨 넣는구나.
몇 천 년을 건너오는 과거의 이야기가 재미없는 아이들을 본다. 뛰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장소에 데려와 놓고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엄한 부모가 싫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무덤과 전쟁유물, 영원히 살 수 없다 탄식했던 선조가 남겨준 유산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고, 쿵쾅거리면서 뛰어다녔다.
여러 실수를 범하고는 더 나은 것을 미리 물려주려는 선대의 시도 사이로 또 다른 실수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히 우리는 실수를 쌓아왔다는 점인데 물리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씁쓸해했다.
6월 13일
한 주제를 천착하다 보면 주위를 보지 못하는 터널시야를 얻는다. 엄밀하고 명확한 과정을 거쳐야만 정확하고 분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에, 고집스럽게 우물을 판다 한다.
연구 주제의 주변부는 근거가 되고, 결과로 향하는 징검다리일 뿐 쓰이고 나면 잊힌다. 시야 안에 있는 사람도 종이 너머의 사람도 단순한 숫자가 된다.
터널을 파내면 빛을 만날 거라는 기대감. 더 깊게 우물을 파면, 의연히 권할 만한 시원한 물을 얻을 거라는 설렘. 그런데 난 그곳에서 되돌아 나올 수 있을까. 뒤로 던진 흙먼지를 쓸어 담고 중심으로 낙하하는 강한 힘을 거슬러, 물을 길어낼 줄도 알아야는데.
6월 18일
사람의 심리를 연구한다는 게 다 의미가 없어지면 어쩌나 한다.
사람을 연구하는 사람의 출현이 자의식 과잉의 일면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마음의 탄생은 괴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스운 두려움이 반복된다.
가치의 해체를 무가치로의 대체로 오독한 장면들에서 텅 빈 마음들, 더 들여다볼 것이 없는 얕은 마음을 본다.
더 큰 것을 자주 생각한다. 더 이상 도피라 볼 수 없는 멀고 먼 별로의 회귀 같은 것들.
6월 26일
근 3개월의 시간을 정리했다. 생각이 뻗어가는 흐름을 따라 유추되는 디딤돌을 찾아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을 긁어모았다. 거의 읽고 나니 몸이 무척 굳어있었고 눈은 충혈되고 목은 따가웠다.
아직 다 못 읽은 네다섯 편은 남았는데, 그것마저 완독 할지는 미지수다. 천착이라는 행위를 잠시 멈출 때가 되었다 생각했고, 새로 출력한 논문이 조금 무서워졌다. 이제는 움직임의 관성을 역행하여 가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멈춰, 마침내 그들의 발견과 주장을 근거 삼아 나의 주장을 제시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7월 5일
어제는 칠리새우로 3인분을 했다. 접시에 담는 법은 배우질 못해서, 소스의 양을 적당히 하고 밥 양을 알맞게 하는 법을 몰라서 보기에는 그럴듯하지 않은 식사가 되었다. 핑거푸드를 집듯이 맛난 저녁을 먹고 배가 안 채워져 배달음식으로 치킨을 불렀다.
오늘 처음으로 매미 소리를 들었다. 아니 매미는 진작에 울었었나 싶은데 기억이 없다. 매미가 좀 늦었구나 하다가, 역시 인간 때문에 늦었으려나, 했다. 온난화의 기적이다.
사람은 플라스틱과 공존하기로 택해서 새우를 조금, 그보다 더 많이는 닭과 함께 산다. 생물의 보존은 인간의 먹이냐 아니냐로 나뉘고 직접 기를 수 있는가로 판가름 난다.
화성을 가고 120살까지 살고 그런다는데, 세 살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가면서 밖에서도 새는 바가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땅을 제쳐두고 자꾸 하늘로 향하는 것은 주술과 미신이 남긴 유전적 허례일까 싶기도 하고.
식물 한 줄기를 기르기보다 뽑아내는 게 쉬운 이들을 도울 외부의 존재는 없다는 현실은 외로운 일이고, 300년 전부터 그 실제를 알았던 이들의 후손들이 자라 내부의 돕는 존재들을 소거해가는 것은 웃프다.
8월 21일
무언가를 얻을수록 과거의 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습관을 따라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그럴 순 없어.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라고 말해오다가도 어느 순간 이래서 이래 왔다는 내부 사정을 확인하면 분노와 함께 이해가 찾아오는 양가적 감정 및 판단이 자리한다. 그곳에서 갈림길 혹은 세 갈림길, 혹은 로터리와 같은 선택지를 만나면서 나는 인간이 결정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오롯이 새기고 계속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대하고 분노하기 위해 이해와 공감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공감과 이해의 마음에도 여전히 지켜야 할 것과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고자 하는 용기와 반성의 자리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물론 이것도 아는 것이고 아는 만큼 행동으로 옮긴다는 게 쉽지 않다.
9월 2일
하늘이 이렇게 이쁠 일인가. 그대로 두어야 괜찮은 것들이 있구나 싶다가도 가만히 있기엔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떠오른다.
9월 9일
어제오늘의 슬픔과 행운은 인생의 표정이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표정이란 무엇일까. 얼굴 그 자체라 할 수 없고, 눈 코 입의 조합과 동일하지 않지만 별개로 존재하지도 않는, 마치 깃들어있지만 거기 어딘가에서 나타나야만 바라보게 되는 초가을의 바람과 같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잠시 울고는 말끔히 일어서야 했던 어제를 굽이쳐 넘어온 오늘, 난 왜 유독 행운과 호의와 칭찬을 맞이해야 했는가를 질문하다 이내 멈추었다. 해야 할 일을 늦추기를 자주 반복하면서 속도 없이 즐거워하고 싶어 했다.
9월 16일
밀푀유나베가 샤부샤부가 되었던 어제저녁. 식재료를 화요일부터 하나씩 사다 두었다가 갑작스러운 약속 취소를 틈타서 보기에만 거하게 차려먹었다.
요리라는 행위에 매료되어 왔다. 나는 원색에 가까운 재료들이 적절한 짜임새로 구성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마법 같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좀 더 나이가 들면 멋들어지게 할 수 있겠지라는 다짐은 간을 맞추고 끼니를 때우는 단순한 목표를 따라 오래 찾지 못한 목적이기도 하였다는 사실까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조리방식을 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그 끝에 완성되어가는 눈앞의 음식을 보고 있자니 종말이 떠오른다, 뜬금없게도. 마치 '돈 룩 업'의 마지막 장면처럼 식탁에 앉는 잠시가 알 수 없는 경건과 뚜렷한 욕구로 채워진다. 더 이상 감사기도라는 의식은 치르지 않지만 그 둘은 살아있음과 살아가려 함에 관한 유동적인 조합이라는 것을 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건지고 건져내다 보니 드러난 밑바닥을 보고 만다. 일련의 오묘한 행위를 끝마치면 작은 충만감과 안도감이 생겨나는데 이 또한 무엇인지 안다. 맑게 씻어질 그릇을 보면서 내일은 오겠구나 싶다. 아니, 최소한 삶의 뒷모습을 정리할 설거지의 기회가 오늘까지는 주어졌다면서.
한편, 매일 이른 종말이 줄곧 미끄러져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나둘 그릇은 깨지고 경건은 무덤에 놓인다. 빙하는 바다 한가운데 누웠고, 사람들의 몸이 일찍 누인다. 이처럼 침강하는 세상과 함께 잊혀 간 분개의 뜻은 분노하고 슬퍼한다임을 찾아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