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작곡가나 가수가 음원을 소유하긴 하지만 음악은 한 사람이 가질 수 없다. 부르는 이의 것처럼 보이는 무대에서도 결국 음악은 듣는 이를 위해 존재한다.
한때 자주 들리던 추모곡이 있었다. 본래 유명한 가수가 외국의 한 장송곡을 번안하여 부르고 녹음한 곡이었다. 이후 길고 깊은 슬픔이 이어지는 큰 사회적 재난이 일어나자 그는 이 곡을 추모를 위해 헌정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듣고 부르고 함께 슬퍼했다.
한 사람이 얼마 전 해당하는 그 추모곡, 곧 장송곡이었던 노래를 새롭게 해석하며 자신의 무대에서 불렀다. 자신의 인생과 함께하던 이들을 추억하고 찬사를 보내는 일에 그 곡을 사용하였다. 생각해보니 별로 슬프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죽어서도 바람처럼 흐르며 지낼 수 있길 바란다 하였다.
글쎄, 음악은 홀로 소유할 수 없다. 물론 한 사건만을 위해서 사용되기에도 음악의 사용처가 넓다. 그러나 사회적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쓰인 장송곡이 혼자만의 추억을 위해 온갖 곳으로 송출되는 무대에서, 다른 이야기와 함께 쓰일 수가 과연 있는가.
3월 17일
인간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간들 스스로가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 이상으로. 짧은 역사 속의 잠깐의 계몽 속에서 인류는 생리학, 진화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등의 분야에서 설명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도덕이 힘을 잃고 법과 돈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의지는 의미의 상을 엎어버렸다. 쇼펜하우어의 조소와 빅터 프랭클의 한숨이 들린다. 인간의 비합리적 탐욕은 새롭지 않은 것이다.
다만 멸종의 순서표를 뽑고서 빚진 것을 갚기 위해 기다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시간이 남은 것일까 과학자들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세계라는 거대한 우물에서 우울만을 건져내도록 조직된 유전자의 산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읽은 인간 세계에 관한 우려는 어느 때보다 분명하고, 혐오가 담긴 어느 이야기가 오늘을 분명히 슬프게 한다.
3월 24일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웅은 필요 없다. 그리고 난세도 원하지 않는다. 천하를 호령하는 난 사람 치고, 되고 들은 사람 보기 어렵다.
난세와 영웅은 마치 닭과 계란과 같아서 무엇이 먼저 일어서고 일어났는지 알기 어렵다. 우주의 시작으로 거슬러 최초를 묻는 일은 멋지고 재미있긴 하지만, 이미 나란히 존재하는 것들의 선후관계를 파악하려는 물음은 현 상태에 도움이 안 될 듯하다. 그저 상황을 이해하고 개선해보려 시도하는 일이 가치 있다.
닭과 계란들 사이에서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고 자신이 옳다고 말하며 하늘의 뜻을 안다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리므로 지금은 분명 심상치 않은 때인가 보다. 아마도 요즘의 난세는 영웅이 아니라 책사의 시대인가 싶은데.
어찌 되었든 나에게 메시아는 필요 없고 천사도 필요 없다. 그저 우주를 가끔 논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공간의 나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