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인가, 업보인가...
“기억상실증입니다”
“뭔 기억상실증이요?”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고요. 엉덩이 부위에 힘쓰는 방법을 잃어버려서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고 불러요.”
허리가 아파서 찾아간 정형외과에서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뇌 기억상실증도 아니고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니!‘ 남에게도 말하기도 낯부끄러운 소견을 받아 들고 나오며 내 엉덩이를 조심히 내려다봤다.
'넌 언제부터 기억을 잃어버린 거니?'
“오늘 일찍 출근했네?”
“언니, 저 아직 퇴근을 못했습니다.”
“야, 대체 너 몇 시간째 앉아 있는 거야?”
“15시간째 이러고 있습니다.”
방송작가가 된 지 6개월 차. 막내 때 가장 먼저 배우게 되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업무가 바로 ’ 프리뷰‘였다. <프리뷰: 영상에서 출연자가 하는 말과 상황을 글로 옮기는 작업. 촬영한 영상이 많아 프리뷰 한
내용을 보고 메인 작가와 피디가 편집함>
한 번 의자에 앉으면 5~6시간은 기본이고 봐야 할 영상이 많으면 1박 2일 동안 프리뷰만 한 적도 있었다. 의자와 내가 한 몸이 되어 가는 동안, 프리뷰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마치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듯 나는 노트북 키보드를 신나게 두드리며 영상 속 대화를 실시간으로 글로 옮겼다. 그러는 사이 내 엉덩이는 혹사당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막내 작가가 프리뷰와 고군분투하는 시간, 서브와 메인 작가는 원고를 쓰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언니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
“타타타타”
대답 대신 선배들은 뭔가를 썼다가 지우는 듯
백스페이스를 연속 누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내일 오전에 있는 더빙 시간을 맞추기 위해 10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망부석처럼 앉아 있다. 배고픔도 잊은 채 그녀들은 그야말로 초초초초 예민 상태다.
“꼬르륵”
막내 작가의 배꼽시계는 늘 눈치 없이 울린다. 더 소리가 나기 전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배들의 신경에 거스르지 않도록 조용히 화장실로 가서 누가 있는지 확인부터 한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부스럭 오예스 봉지를 하나 꺼낸다. 나의 작고 소중한 간식이 노출되지 않도록 아주 민첩하게 입속으로 욱여넣는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음이 급해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 급급했다. '일단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 나만의 생존 방식으로 버텼다. 당시 자리에서 간식을 먹는다고 뭐라고 할 선배들도 아니었지만 혼자 먹는 게 죄송스러워서 했던 행동이리라.
어느 날, 한 선배가 핏기 없는 표정으로
출근해서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
“아, 이거? 치질이 도져서...”
도넛 방석이다. 가운데 구멍이 큼직 막 하게 파인 부분이 과녁이라도 된 듯 엉덩이를 끼어 맞추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선배들이 건너왔던 시간을 이제는 내가 통과하고 있다.
다만,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는 생소한 병명이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동안 고생한 내 엉덩이에 연민이 들어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 동네에서 가장 전문적으로 보이는 PT샵에 들러 손을 부들부들 떨며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내 월급의 절반 가까이 되는 거금을 플렉스했다.
부디, 기억을 찾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