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마감러를 꿈꾸다
”왜 고생을 사서 하냐? 너 거기 가면 하루에
1년씩 늙어 “
”알고 있어,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
”미쳤네.... 너, 그것도 병이야 “
막내 작가와 갓 서브 작가의 이름표를 단
후배들이 하드 트레이닝 코스로 시작한다는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 6차인 내가 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뜯어말린 것이다.
내레이션 대본을 쓰는 속도가 느린데
생방송을 하면 빨리 쓸 수 있을까?
하지 말았어야 하는 질문에
손수 지옥문을 열고야 말았다.
생방송 D-6.
”섭외 아직이야? “
”죄송해요.... 좀만 더 찾아볼게요 “
메인 작가의 압박이 돌덩이를 안고 있는 것보다 무겁다.
맛집 코너를 맡고 있던 터라
특이한 메뉴가 있거나 식당 주인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있는
식당을 섭외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사장님! 000 방송국의 맛집 코너 작가인데요.
어떤 손님 분이 글 올린 거 보니까
같은 음식인데 누구는 2,000원 싸게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맞나요? “
”그건 왜 물어봐요? “
'앗.... 퉁명스럽다.'
식당 사장님들은 방송국에서
전화가 오면 일단 경계부터 한다.
”손님들이 칭찬하시더라고요.
본인이 먹은 거 직접 퇴식구에 갖다 주면
2,000원 할인해 주신다고 “
”네 맞아요... “
1차, 팩트 확인 성공.
”사장님, 이런 내용 너무 재미있잖아요~
사장님의 철학을 방송에서 소개하려고요 “
여기서부터는 압박 수비 전략이 들어가야 한다.
사장님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
어떤 내용을 포인트로 촬영할 건지,
식당에 어떤 베네핏이 있는지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사장님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 안에 설득해야 한다.
다 왔다. 이제 골만 넣으면 된다.
”작가님, 생각 좀 해볼게요 “
안돼~~~~
사장님들이 말하는 생각은 '거절'이 대부분이다.
90분 이상 통화를 하며 숨차게 달려온
나의 노력이 왠지 자책골이 된 듯했다.
식당에 전화라고 설득한다고 해서
단박에 섭외되는 일은 거의 없다.
촬영 확답을 받지 못하면 빨리 다른 곳으로
키를 돌려야 한다.
숨 막히는 섭외의 시간을 거쳐,
결국 다른 식당을 극적으로 섭외했다.
생방송 D-3.
”작가님! 식당에 왔는데 오늘 문이 닫혔는데요? “
”뭔 소리예요? 어젯밤에 사장님하고
마지막 통화도 했는데.... “
피디의 전화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남자친구보다 더 많이 통화했던 사장님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촬영하기로 한 날, 펑크를 낸 것이다.
“피디님, 11시까지 기다려보고 안되면
촬영 철수할게요.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우리 촬영 못하면 방송 펑크예요!”
울 시간도 없다. 처음 섭외하는 것처럼
우주의 온 기운을 빌려 간절함으로 휴대폰을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의 꿈은 식당 섭외를 완료하는 것이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내일 우리 꼭 만나요!
내일 펑크 내고 그러면 정말 안 돼요, 약속~”
시간에 쫄 릴수록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정말 간절할 때만 찾아온다는
섭외의 신이 내 입에 강림하신 것.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생방송 D-1.
“저는 이 부분 재미있는데 넣었으면 좋겠어요.”
“0작가, 재미없는데 편집하자”
피디와 의견이 갈려 투닥거리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편집 시간이 길어진다는 건
내레이션 대본 쓸 시간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와.. 나 손 느린데 어떻게 마감 시간에 맞추지?'
생방송 7시간 전.
본격적으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편집한 영상을 보며 인터뷰와 현장음 사이에 들어갈
내레이션을 쓴다.
“여기는 쓸 말도 없는데
뭐 이렇게 영상을 길게 붙였어?”
분명 피디와 같이 편집을 해놓고도
아쉬운 부분들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영상이 긴 부분에 어떤 내레이션을 써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와.. 나 멍청이인가? 아니야!! 나는 천재다!!!!
일단 아는 곳부터 풀자’
대본을 쓰는 시간은 꼭 시험을 치르는 것 같다.
내가 부여한 멍청이와 천재가
짧은 시간을 오가며 대본을 써 내려간다.
피카츄가 전기를 모아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듯 초집중의 시간이다.
생방송 1시간 전.
대본 완료. 이제 편집실에서 복사기가 있는
대기실로 전력질주하면 된다.
‘아! 1번 복사기는 잼이 걸렸다’
‘젠장! 2번 복사기는 USB가 안 먹힌다’
떡진 머리에 퀭한 몰골로 방송국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데,
아침 7시. 멀쩡한 복사기를 찾아다니는
작가가 한둘이 아니다.
생방송.
스튜디오 문 앞에 붙은 '온에어' 간판에 불이 켜지고,
MC의 오프닝 멘트로 생방송이 시작된다.
“0 작가, 지금이야!”
방송 모니터에 며칠 동안 내 속을 끓였던
맛집 영상이 나오고 있다.
TV에서도 같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을터.
부조실에서 사인을 주면,
카메라가 주시하는 세트 위로 조용히 올라간다.
아나운서가 화면을 보며 대본을 읽을 수 있도록
그 옆에서 큐사인(cue sign)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가 실수 없이 대본을 거의 읽으면,
카메라에 내가 잡히지 않도록 시간을 벌며
세트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만약 내 모습이 나오게 된다면 끔찍한 방송 사고다!
마지막 미션까지 완료!
그제야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긴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온다.
생방송 1시간 후.
집에서 잠을 몰아서 잘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방송 털었다! 크~ 이 맛에 방송하는 거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 나를
메인 작가가 부른다.
“너, 다음 아이템은 뭐 할 거니?”
`!!!!!!!!!!'
깊은 빡침에 잠까지 확 달아난다.
그래서 대본을 늦게 써서 자신을
시험해 보기로 한 작가의 고민, 해결됐냐고?
생방송은 제 시간에 나가지 않으면 사고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고보다 더 무서운 사실.
방송이 나가야 페이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건이 나를 채찍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브런치에 성실히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 거 같다.
꾸준히 자신의 데드라인을 지키는
작가님들이 존경스럽다.
다들 데드라인을 어떻게 정하고
지키는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