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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Jun 19. 2023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시는 시부모님

2021년 3월 5일. 


시어머니께서 잠깐 올 수 있냐는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이유는 말씀 안 하셨지만, 일단 얇은 재킷을 걸치며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는 자서방에게 외쳤다. 


"나 시댁 간다!"

"또?" 

그러게... 넌 왜 안 가니... 이쯤 되면 누가 친자식인지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시댁 거실로 들어가자 시아버지께서 마치 간이 사무실을 차려놓으신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내 서류들이 소파며 탁자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시아버지께서는 열심히 한 손으로 타자를 치고 계셨다. 

"네 비자 때문에 경시청 디렉터에게 이메일을 쓰고 있단다. 같은 내용으로 오늘 편지도 보낼 거야." 

아... 

잠깐 오라고 하셨을 때 나는 내 비자 관련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미셸이 같은 내용을 우편으로도 보낼 건데 거기에 네 서명이 필요하다는구나. 그래서 불렀지." 

시아버지께서는 곧 이메일의 내용을 보여주셨다. 

내 비자가 다음 달이면 만료가 되는데 온라인으로 경시청에 헌데부를 잡으려고 해도 안되고, 헝다 부 없이는 방문도 안 받아준다고 하니 부디 헌데부를 잡아달라는 내용을 아주 정중하게 쓰신 거였다.


정작 내 남편은 주말이라고 집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는데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자서방도 이미 이메일도 보냈고 전화도 시도했는데 잘 안 돼서 시부모님 지인찬스를 위해 이 상황을 알렸던 것이다.)

시어머니께서는 휴대폰 메시지를 하나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파티마가 경시청에서 일하는 친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단다. 그런데 그 친구도 온라인으로 헌데부를 잡는 방법뿐이라고 하더구나. 다만 자정이 넘어서 시도하다 보면 예약 가능한 날짜가 열릴 확률이 높다고 하네. 너 혼자 매일 자정까지 기다리려면 힘드니까 나랑 격일로 자정까지 대기하는 게 어떠니?"  


왜 자꾸 감동시키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아니에요. 제가 자정까지 매일 확인해 볼게요. 혼자 확인해도 괜찮아요."

시아버지께서는 이메일을 전송하신 후 우편으로도 한번 더 보내기 위해 타이핑을 다시 이어가셨고, 시어머니께서는 옆에서 정보 확인을 돕고 계셨다. 

그 사이 할 일이 없던 나는 내 집처럼 부엌에 가서 어슬렁 거렸다. 



간식거리가 있길래 통째 들고 와서 하나씩 집어 먹었다. 

"아, 그거 마리 필립이 직접 구웠다며 가져왔단다. 하얀 머랭은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음식을 테이크아웃해 올 때 같이 온 건데 너무 달아서 다 못 먹었어. 맛있으면 너 다 먹거라." 

내가 먹는 모습을 보시더니 시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손뼉을 탁 치시며, 핫초코를 만들어 주시겠다며 일어나셨다. 

"아니에요. 저 벌써 이 쿠키 세 개째라 그만 먹어야 해요! 마리필립 아주머니께 전해주세요. 이거 너무 맛있어요!"

"그래도 이건 꼭 맛봐야 해. 내가 최고의 핫코초를 만들어줄 거니까."


"음... 그럼 먹어야지요."



나를 위해 한참 집중해서 타이핑을 하시는 시아버지를 뒤로 한 채 나는 시어머니께서 '최고의 핫초코'를 만드시는 장면을 구경하러 갔다. 먼저 에어로치노를 꺼내시더니 '정말 맛있는 초콜릿'을 그 안에 가득 부으셨다. 그리고는 냄비에 끓인 우유를 초콜릿 위에 붓고 돌리셨다.   



그 사이, 새로 구우신 시나몬 브리오슈라며 한 덩이 잘라서 싸주셨다. 그리고 나 주려고 아시아마트에서 사 오셨다며 김밥 발이랑 주걱도 꺼내주셨다. 

으... 오늘은 감동 주시는 날인가요...

집에 있는 자서방을 떠올리며, 대체 누가 이 집 친자식인지 한번 더 생각해 보았다. 



"찬장에서 잔 하나만 꺼내다오."

"왜 잔이 하나예요? 이렇게 많이 만드셨는데요!" 

"이거 다 너 혼자 마실 거니까. 호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며 정말로 잔이 찰랑찰랑 하도록 가득 부어주셨다.



내가 잔을 처음으로 입에 가져갈 때 시어머니께서는 숨죽이시며 내 반응을 기다리고 계셨다. 


"진짜 최고 맞네요! 핫초코는 이 집이 프랑스에서 최고예요!" 

쌍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하자 시어머니께서는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 남은 핫초코는 다른 잔에 마저 부어오셔서 시아버지와 두 분이서 나누어 드셨다. 




오잉? 이스탄불! 넌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니?

나도 놀랬는데 얘도 내가 온걸 이제야 발견했나 보다.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완성된 편지를 인쇄해 오신 시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서명을 하게 하셨다. 그러고 나서 내 주요 서류들 몇 장과 함께 우편 봉투로 넣으셨다. 

"제가 가는 길에 우체통에 넣을게요." 

"아니야. 이건 등기로 부칠 거라 내일 오전에 내가 우체국에 갈 거야. 그쪽에서 등기를 받으면 너희 집으로 영수증이 갈 테니 그것도 서류들과 함께 잘 보관하렴. 이걸로 헌데부를 잡는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나중에 네 비자가 만료되었을 때 우리가 이런 시도를 했다는 증거로 이용할 수는 있지."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시아버지께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연신 반복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말거라. 이래도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테니."

솔직히 저보다 두 분이 더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요...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다. 인터넷으로 헌데부도 못 잡게 했으면서 헌데부가 없으면 경시청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애간장만 태우다가 비자가 만료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시부모님을 뵙고 나니 실제 뭔가 해결된 건 아직 없는데도 다 잘 해결될 것만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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