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옹빌에서 맞이한 일요일 아침.
늦잠을 푹 자고 나서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왔더니 부지런한 버거씨가 부엌에서 팬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잘 익은 바나나를 으깨어 넣은 바나나 팬케이크이란다.
냄새가 좋다고 했더니 버거씨는 갓 구워낸 뜨거운 팬케이크 하나를 손으로 잘라서 호 불어 입에 넣어주었다.
눈뜨자마자 먹는 팬케이크이라니. 아직 입맛도 없는데...
엥? 맛있네!
아침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어느새 나는 팬케이크 앞에 의자를 당겨 앉고 있었다.
블루베리를 씻어주길래 요구르트에 한 줌 넣어서 푹푹 퍼먹었다. 아침부터 예정에 없던 입맛이 너무 도는 바람에 늦잠 자고 있는 이 집 두 아들이 먹을 것까지 내가 다 먹어치울 뻔했다.
잠시 후 건장한 두 아들이 내려와서 내가 먹던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게 아빠가 준비해 놓은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해치웠다. (평소 주말에 아들들은 거의 자기네 엄마집에 있어서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버거씨는 나와 아들들에게 오늘 무얼 하고 싶은지 차례로 물었다.
"나는 좀 귀찮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셋이서 하고 싶은 거 해. 나는 그냥 영화나 볼래."
이것이 나의 솔직한 대답이었고, 두 아들은 조깅을 하러 가자고 했다. 체력들도 참 좋아. 똑같이 많이 먹었는데 어쩜 나만 늘어지냐.
세 남자는 곧 모젤강변에 조깅을 하러 간다며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최대 두 시간 안에 돌아올게."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그새 변심하고 벌떡 일어나서 간식을 챙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 남자에게 내가 말했다.
"나도 따라갈래. 뛰지는 않고 그냥 강변에서 혼자 산책하지 뭐."
나는 변덕쟁이다.
모젤강변에 차를 세우고 세 남자는 조깅할 채비를 했다. 우리 버거씨는 조깅할 때도 말이 많은 아빠였다.
"달리기 전에 잠시 몸 온도를 올리자. 자 스트레칭... 그리고 제자리 달리기... 하나 두울 셋..."
아이들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마치 교관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버거씨가 하는 대로 다 따라 했다. 어쩜 이렇게 순하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군것질거리가 가득 들어있는 내 가방을 흡족하게 쓰다듬었다.
"우리는 이쪽으로 8킬로 정도 달릴 거야. 너도 같은 방향으로 강 따라 산책하면 돼."
그 말을 남기고 버거씨는 말 잘 듣는 두 아들을 이끌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도 설렁설렁 뒤따라 걸어가 볼까나.
산책길에 내가 맨 먼저 마주친 모습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는 소들이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얘들아!
내가 말을 걸었더니 더 쳐다보는 소들
이거 오디 맞나? 가는 곳마다 널려있었다. 벌써 열심히 따먹고 있는데 버거씨가 곧 오디가 많은 장소의 사진을 메시지와 함께 보내왔다. 안 그래도 먹고 있어요...
호두나 깨금도 있었다. 익을 때쯤 다시 와야겠다. 너네 다 내 거.
정말 평화로운 풍경 너무 좋다.
오른쪽 강변 쪽으로는 가족단위로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 모습 역시 평화로운 풍경의 한 장면이었다.
40분쯤 걷다가 다시 반대로 발길을 돌려서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강을 보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말고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나에게 인사를 건네길래 나도 "봉쥬"하고 간단히 대답한 후 갈길을 부지런히 갔다. 그 남자는 자전거를 끌고 따라오면서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이 동네 사세요?"
"아니요."
"아, 저도 다른 곳에서 왔어요. 혹시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남자친구 만나러요."
이 대답을 들은 그 남자는 다시 자전거에 오른 후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 요즘 좀 먹히나?
내가 모르는 사이 좀 이뻐졌나 싶어 괜히 휴대폰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봤는데 입가에 과자부스러기만 가득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남자 이야기를 했더니 버거씨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벌들이 꼬인다니까! 이러니 내가 너를 어떻게 혼자 두니. 맨날 따라다닐 수도 없고...!"
애들이 웃겠다. 그만해 민망해. 누가 들으면 절세미녀, 꽃 중의 꽃인 줄 알겠어...
담에는 남자가 말 걸어도 버거씨한테 말하지 말아야겠다. 오늘은 그냥 좀 자랑하고 싶었어...
집에 오자마자 버거씨는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의 메뉴는 정어리 구이.
간을 미리 해 둔 정어리를 뜨거운 그릴팬에다... 다 뭉개버리네...
사이드로는 야채를 듬뿍 넣은 쿠스쿠스 볶음-
모양은 다 망가졌지만 그래도 맛있다. (그나마 제일 덜 망가진 생선들만 내 접시에 골라준 모양이다)
삼부자와 나는 테라스에서 맛난 점심을 먹었다. 운동을 하고 먹으니 더 꿀맛이군. (나도 운동했음. 걷기 운동.)
요리를 좋아하는 나지만 남이 해주는 요리는 더 맛있구나.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내가 가져온 보드게임 Rummy를 했다. 다들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게임이라고 하더니 막상 룰을 배우니 잘만 이기는군?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게임을 하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드게임은 좋은 것!
삼부자가 서로 농담하고 놀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하다가 아이들이 엄마네 집에 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기도 했다. 아무리 바빠도 게임판을 정리하는 걸 서로 도와주는 아들들을 보니 참 부모가 뿌듯하겠다 싶었다.
"아들들 참 잘 키웠다. 둘 다 참 친절해."
"정말 고마워. 애들도 너 좋대."
"누군들 날 안 좋아하겠니?"
농담으로 대충 대답을 대신했다.
내 인생이 뭔가 빨리 변하는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나 루미 놓고 갈게. 다음에 우리 또 다 같이 하자!"
버거씨는 내 대답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