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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양 Sep 17. 2023

[독후감] 죽음의 수용소에서

In Life, why가 아닌 how로 물어라

https://images.app.goo.gl/M12qZPsyCE1tPWQNA


# 수용소에서 깨달은 것


   책의 저자인 빅터 플랭클은 실제로 아우슈비츠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아우슈비츠의 혹독한 노동과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을 넘어 인간 존엄성 박탈과 불확실한 생사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정신까지 훼손시켰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그 경험을 책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용소의 모든 경험과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꽤 유용한 교훈을 준다.




# 상황이 아닌 태도를 바꿔야 한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생겼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우선 아우슈비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감소는 자유, 존엄성 같은 이상적인 가치관들은 멸시되는 곳이며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조자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다. 그저 수감자들이 죽지만 않게 살려두기만 하면 되는 곳이니깐. 살려둘  필요조차 없는 인원들은 언제든지 죽음으로써 정리하기 쉬운 곳이 아우슈비츠였다.


   참담한 수용소 생활에서 행복이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수감자 대부분이 불행 속에서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감자들은 절망 속에서도 행복을 찾았다. 건더기가 조금 더 있는 수프에 만족했고, 짧은 쉬는 시간 간 흥겨운 음악에 즐거워했고, 덜 힘든 작업반에 배치된 것에 운이 좋다고 감사했다. 그렇게 행복해했고 버텨냈다.


   빅터 플랭크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꼭 좋은 일에서만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행복하고자 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행복의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분명 행복은 있다. 그렇기에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없어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p.120



# 고난을 버티는 힘, 삶의 이유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by 니체 p.137


힘든 수용소 생황을 끝까지 버텨낸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확고한 미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살아남아서 책을 쓰겠다는 삶의 목표가 있었고, 동료 한 사람은 가족에게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현실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가 되었고, 그 이유는 삶의 의지로 이어진다.


   삶의 의욕이 없는 이들에게 지금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무의미함은 공허함으로, 공허함은 다시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까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빅터 플랭크는 무의미함을 느끼는 환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각자의 기대감을 심어줌으로써 치료했다. 이처럼 만약 지금 당신의 삶의 고되고, 인생의 방향성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 자신의 꿈의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지난날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p. 138


# 운명이 있을까? 있다면 벗어날 수 없을까?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죽음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 벗어난 자리가 죽음을 마주하는 자리가 되는 이야기. 근데 정말 운명이 있기는 할까? 있다면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수감자들은 자신이 내린 사소한 결정이 생사를 가르는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모든 순간의 선택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가령 특별 작업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했을 때, 손을 들어 자원하는 것이 득실이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인위적인 개입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모든 것을 비웃듯이 죽을 놈은 뭘 해도 죽게 만들었고, 살 놈은 뭘 해도 살려 놓았다.


   예전에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 나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고는 운명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은 후회 없이 노력하고도 안되면, 운명이 아닌가 하고 미련 없이 포기한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그저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오로지 내 몫인 것이다. 설령 그 운명이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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