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실험적 해석, 극단 ‘뜬, 구름’의 <베니스의 상인>
고전의 실험적 해석, 극단 ‘뜬, 구름’의 <베니스의 상인>
<베니스의 상인>은 <한여름 밤의 꿈>, <십이야>, <말괄량이 길들이기>, <뜻대로 하세요>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5대 희곡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어느 셰익스피어 작품이 그렇듯, <베니스의 상인> 역시 수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프로덕션이 다양한 방법으로 제작하여 공연되어 왔다. 2023년 국립창극단 시즌 공연에는 창극의 형태로 <베니스의 상인>을 재해석한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이 올라올 예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16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일어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과 기독교인 상인 ‘안토니오’의 이야기이다. 고리대금업의 문제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고 있던 중세 유럽 사회가 상업의 발달과 함께 고리대금업의 필요성이 확대되었다. 이자를 받기 위해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악당과 같은 존재인 고리대금업자의 역할을 당시 교회는 예수 처형한 유대인들에게 맡겼다. 유럽 사회에서 계속해서 소외받던 유대인들은 다른 직업을 얻을 방법이 별로 없었기에 비난을 받으면서 고리대금업자로 살아간다.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당하고 당하는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풀어내면서 당시 영국 사회가 유대인에게 갖고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녹여낸 작품이다.
극단 ‘뜬, 구름’은 기존의 베니스의 상인을 극단의 특징에 맞게 재해석하여 여행자 극장에서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공연했다. 레트로 음악극, 키치적 감성, 텍스트의 시각화라는 극단의 지향점을 바탕으로, 재즈와 스윙댄스, 아카펠라의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하고, 하찮은 예술품을 뜻하는 ‘키치’를 작품 안에 녹여내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였으며, 배우의 신체와 다양한 상징을 활용해 ‘뜬, 구름’만의 <베니스의 상인>을 무대 위에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판다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다>,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 브레히트의 희곡 원작의 음악극 <사천의 선인>,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등의 작품을 2016년 부터 꾸준히 공연하였다.
<베니스의 상인>은 극단 ‘뜬, 구름’의 대표적인 레파토리 작품으로, 2018년과 2019년에 두 차례 공연되어서 올해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뜬, 구름’의 <베니스의 상인>은 고리대금으로 많은 이자를 챙기던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담긴 원작의 의도와 다르게, 차별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고리대금업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샤일록의 인간적인 불행과 슬픔에 집중하였다. 샤일록의 딸 제시카가 기독교인 로렌조와 함께 떠나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한 것을 깨닫고 분노하는 장면을 다른 장면보다 조금 과장된 연기와 목소리로 표현한 부분이 샤일록의 슬픔이 관객들에게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도록 하기 위한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파티에 참여한 샤일록이 따돌림을 당하며 무대 위에 혼자 남아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유대인이기에 겪는 그의 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인종 차별 논란은 아주 오래전 부터 지금까지 해결되고 있지 않은 문제이다. 이러한 동시대적인 문제점을 <베니스의 상인> 속 샤일록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다.
작품은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이야기와 벨몬트에 사는 부유한 상속녀 ‘포셔'의 이야기로 나누어서 진행하다가 두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진행되는데, 포셔를 다양한 음악과 함께 그려냈다. 금상자와 은상자, 납상자 중 포셔의 사진이 들어있는 상자를 뽑아야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는 미션이 계속해서 그려지는데, 그러한 과정을 재즈와 아카펠라가 등장한다. 음악이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었고, 작품과 통일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라는 생각이 들어서 장면을 가볍게 즐기며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청혼자들의 등장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공연을 즐겼다.
객석에 입장하면 무대 위에 안토니오와 로렌조가 나와있었다. 유대인과 갈등을 겪게 되는 안토니오와 유대인의 딸과 사랑에 빠져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로렌조의 반대되는 표현하기 위한 프리셋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는 다양한 크기의 저울이 매달려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작품에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거대한 저울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차별과 공정성이라는 작품의 주제가 담겨있는 오브제들 같았다. 수중 도시인 베니스를 오가는 곤돌라는 수레가 담긴 세발자전거를 통해 표현했는데, 계속해서 무대를 돌고 도는 자전거에 달린 바퀴들을 보며 균형을 잡아야 달릴 수 있는 자전거에도 ‘공정’이라는 주제가 녹여져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소극장의 작은 무대 위를 오브제를 통해 베니스를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고전 작품 속에는 당시의 구시대적인 시대상이 녹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지점들이 현대에 와서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지점을 비틀어서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극단 '뜬, 구름’의 <베니스의 상인>이 그렇다. 극장을 나오면서 ‘만약 통일성을 갖춰서 음악극으로 진행했다면 어땠을까?’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쉽게 할 수 없는 온갖 실험적 시도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인 것 같다. 배우 각각의 장기와 재능을 모두 활용해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형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학로의 아주 작은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작품 하나하나가 각자의 방법으로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 극장 문화, 공연 문화가 가진 사회적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의 크기와 상관 없이 공연은 하나하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마치 포샤의 세 보석 상자 중에 가장 하찮은 납상자 안에 그녀와의 결혼 티켓이 있던 것 처럼, 극장의 크기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그대는 그런 말을 자주 들었을 터.
수많은 사람이 나의 겉모습에 홀려 생명을 팔았도다.
황금 무덤 속에는 구더기가 우글대는 법!
-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