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tPD Jul 06. 2020

점약의 피로

나홀로 점심의 행복

점심 메뉴 선택 표 (구글링)

직장인에게 점심 약속이 없으면 굉장히 불안한 일이다. 사회 초년생 때는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동기, 선배 등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에 중복되는 점심 스케줄을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점심 약속이라는 것은 일부러 만들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다. 만약에 점약이 없거나 갑자기 취소된다면 다른 사람 점약에 궁색하게 합류하든지 그냥 혼자 먹어야 한다. 그래서 틈틈이 카톡을 날려 점약 빈칸을 채우는 것이 직장인들에게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모두가 빙고게임을 하듯이 스케줄 앱을 켜 점심 약속으로 가득 채운다.


로비에서 점약 상대를 만나 오늘은 뭐 먹을까요? 서로 질문하고 양보하며 점심 식사 동행이 있음에 행복해한다. 조직이 거대화되면서 원활한 일 처리를 위해 넓은 인맥을 갖는 것이 직장인에게 훌륭한 덕목이 된 세상. 점심을 혼자 먹거나 매일 같은 사람과 먹는 것은 아싸를 인증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업무상 필요해서 점약을 잡는 경우도 많다. 점심을 먹는 이 사람이 다행히 마음이 맞는 상대라면 유익한 시간이지만 뭔가 궁합이 안 맞으면 아주 불편한 점심시간이 된다.


요새 나는 점약이 없으면 없는 대로 내버려 둔다. 스케줄러에 비어있는 점약을 보면 오히려 알찬 자유시간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홀가분하다. 다행히 직장이 여의도라 선택지가 많다. 발 이끄는 대로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 동여의도 쪽(여의도역 부근)으로 건너가 새로운 식당에서 혼밥을 즐긴다던지 회사 카페에서 가벼운 먹거리를 사다가 사무실에서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 책, 잡지를 보며 점심을 먹는 경우도 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오는 설렘과 즐거운 대화 대신 얻게 되는 나만을 위한 힐링 시간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좀처럼 갖기 힘든 나 같은 애 딸린 유부남에겐 더욱 필요한 시간이다.

걷고 생각하고 먹고 혼자 놀기 좋은 여의도 feat. 여의도공원+한강공원

점심시간이라고 꼭 식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 잡생각들을 정리하며 공원을 걷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골치 아팠던 문제의 해답을 찾기도 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기도 한다. 타인과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절대 할 수 없는 자기 투자인 셈이다.


혹은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여의도 cgv에 가서 앞뒤를 조금 잘라먹더라도 나 홀로 영화를 보면서 핫도그 세트를 먹는 점심시간 활용도 훌륭하다. 특히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꽤 유익한 시간이다. 다만 영화 시작과 끝나는 시간이 점심시간에 맞으면 좋겠지만, 앞뒤로 영화를 다 못 보는 경우가 있어서 미완의 시나리오는 알아서 채워야 한다. 코로나 시국이라 극장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쾌적하기도 하다.


구름이 마치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매이션 같았던 날의 한강. 그날의 나홀로 점심.

여의도 공원을 걸어서 한강 쪽으로 나가면 서울의 자랑 한강이 펼쳐진다. 드넓은 한강의 탁 트인 시야에 좁은 사무실에서 한없이 좁아진 생각을 다시 넓히며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편의점 음식 조합으로 자연을 느끼며(?) 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편의점 식사의 즐거운 점은 가끔 출시되는 신상품의 실험정신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가장 많이 팔리는 육개장과, 참치마요 김밥을 들곤 한다.


호시탐탐 내 주변을 멤도는 참새와 비둘기

이번 나 홀로 점심 식사의 하이라이트는 자연과의 교감이다.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비둘기, 참새, 까마귀가 몰려들었다.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데 결국 그 협박을 못 이기고 라면을 던져주고 말았다. 처음엔 멀리서 나를 관찰하더니 내가 적극적으로 내쫓지를 않으니 점점 포위망을 좁혀와 결국 목표 달성을 했다. 라면 몇 가닥을 얻어먹은 것. 덩치는 작지만 참새가 결국 제일 가까이 와서 적극적으로 라면을 겟했다.

라면 몇 가닥 얻어먹는 참새

이렇게 오랫동안 참새, 비둘기, 까마귀를 관찰한 때가 있었나? 까마귀는 지능이 높아서인지 사람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오질 않았다. 비둘기는 공격적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들이대긴 했지만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작은 체구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 참새가 내 라면을 가져갔다. 몸집이 작고 움직임이 빨라서인지 가장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이윽고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멀리 있어서 확대한 까마귀

그동안 다가오면 피하기 바빴던 도시 조류 참새, 비둘기, 까마귀였지만 나 홀로 점심시간에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준 귀한 손님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새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처량한 혼밥족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도시 조류의 종별 특징과 습성을 알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었다. 지능이 떨어질수록 사람에게 가까이 온다는 결론?


비어있는 점심 약속을 사람으로 채울 것인가? 빈칸을 오롯이 나의 시간으로 채울 것인가? 둘 다 한쪽으로 쏠리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 전자는 나 없는 내가 될 것이고 후자는 남 없는 내가 될 것이다. 적절한 나와 타인의 조화가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한 달에 한두 번! 약속이 없는 점심시간에 당신의 여행을 펼쳐보시길!

아쉬워서 한장 더. 요새 하늘은 정말 신카이 마코토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전동 킥보드 출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