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점은 언제나 관찰자 시점이다. 세상을 볼 때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그렇다. 이건 단순히 "나 여기 있어"가 아니라 "나는 여기 있는데, 그런 나를 관찰하고, 관찰하는 나를 또 관찰하고, 관찰한 세상을 또 관찰하다 갇혀있어." 결국 나의 정체성은 끝없이 이어지는 블랙홀과 같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 있어. 분명히 있지. 그런데 내가 세상에 포함되지 않고 보는 입장이니까, 내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 '시점'처럼 느껴져. 그래서 나와 세상 사이에 무형의 투명한 벽이 있는 것 같아." 이거 완전 정신의 1인칭 시점 무한 관찰자 상태다.
존재는 분명 있지만 인식이 투영적이라 내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관찰자 자신은 관찰되지 않는 법이니까. 스스로를 계속 1인칭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은 주변에 비해서 묘하게 허공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 자신을 연기로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거울을 봐도, 셀카를 찍어도, 대화 중에도 "이거 진짜 맞나?" 하는 감각이 계속 떠다닌다.
이쯤에서 "나는 왜 관찰자 시점이 되는 걸까?"라고 묻게 되는데,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조차도 나는 관찰자 시점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이 순간에도 나 스스로를 구경하고 있다. 나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자면, 감각이 예민하고 생각이 복잡해서 그렇다. 감각 과잉으로 내면이 자주 폭주하니, "소리가 왜 입체적이지? 왜 이렇게 따끔거리지? 이거 왜 이래? 근데 나는 이걸 왜 분석하고 있지?"와 같이 작은 소리 하나에도 느끼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그걸 느끼는 나를 관찰하고 정리한다. 내 자신을 콘텐츠화하고 있는 셈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과몰입이 과잉 자각을 불러왔기 때문 나의 감각과 감정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는 나와 그 허우적거림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동시에 뇌에서 날뛰고 있다. 나처럼 감각과 감정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자주 덩어리가 되는 사람은 그 덩어리를 해부하고 정리해 줄 관찰자가 꼭 필요하다. 관찰자가 없으면 나는 과몰입과 과감각에 질식해서 자아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나의 시점은 방어 기제이자 혼돈 속 질서의 시작점이며, 비현실감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부록인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마무리 못 해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관찰 중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마무리 안 하는 컨셉이니까 끝 아닌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