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져도 생일은 생일이다

심포지엄 나의 생일특집

by 엔트로피



가족한테 현금 40만 원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그제야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인지했다.
평소처럼 일요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뭔가 해야 하나?”라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준비 안 한 생일이라니.
다음 주에 친구랑 놀 계획은 있지만, 오늘은 그냥 덩그러니 남았다.
급하게 쇼핑 앱을 켰다.





탑텐에서 세일을 하길래 티셔츠, 가디건, 원피스까지 3만 원어치를 구매했다.
뭔가 사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그래서 이번엔 배달 앱을 켜서 케이크를 검색했다.

근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케이크를 꼭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생일이니까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을 뿐.
점심 메뉴도 안 땡겼다.
결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짜증만 났다.

짜증이 난 이유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서였다.
이럴 땐 내 비선형 사고가 폭발한다.
머릿속은 튀고, 생각은 정리가 안 된다.
그래서 말로 뱉기 시작했다.


정리된 생각을 보니, 나는 물건이 아니라 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 말고, 집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냉장고와 부엌을 열어봤다.
말린 미역, 멸치, 고춧가루, 참기름, 바나나, 그리고 기본 제빵 재료들이 있었다.
“그냥 내가 만들면 되잖아?”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먼저 미역을 찬물에 불렸다.
그리고 바나나 케이크 반죽을 시작했다.
케이크는 많이 만들어봤기 때문에 반죽은 수월했다.
오일을 넣자 반죽에 윤기가 돌았다.
“오늘은 잘 풀리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오븐에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모든 과정은 레시피대로 수월했다.
하지만 간 맞추기는 조금 힘들었다.
예전에 팔팔 끓일 땐 맞았는데, 식고 나니 맛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서 계속 맛을 보며 조절했다.
물도 더 넣고, 다시다도 더 넣고…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러다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평소엔 유산지를 틀에 깔지만, 오늘은 귀찮아서 베이킹용 붓으로 기름만 발랐다.
새 베이킹 틀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케이크가 틀에 달라붙었다.
떼다가 중심이 무너져 그대로 바닥에 와그작.

“아, 시발.”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를 조금 떼어 먹어봤다.
맛있었다.
나는 빵을 떨어뜨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속상해 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너무 잘 안다.
그냥 틀에 다시 담고 식히기 위해 바깥에 두었다.






그 사이 미역국이 완성되고, 밥솥에서도 새 밥이 완성됐다.
평소엔 예쁜 그릇에 담는 걸 귀찮아하지만, 오늘은 생일이니까 미역국과 밥을 예쁘게 담았다.
어제 사 둔 와인과 계란밥용 간장이 생각났다.
계란 프라이를 부쳐 계란밥도 만들었다.

생일상처럼 가지런히 세팅을 했다.
와인을 유리잔에 따라 들고 갔다.
그런데 테이블에 놓는 순간 손이 닿아 앞으로 쏟아졌다.

“아, 시발.” 두 번째 발사.
쏟아진 와인을 딱을려다가 갑자기 초코펜이 생각나 초코펜을 녹이러 가스레인지 앞으로 갔지만,

귀찮아져 화장실로 향했다.
수건을 꺼내면서 “시발시발” 세 번째 발사.
다행히 와인이 음식에는 닿지 않았다.
와인을 다시 유리잔에 따랐다.

그리고 미역국을 한 입 먹는 순간, 모든 “시발”이 사라졌다.
“아, 좋다.”




미역국과 계란밥을 맛있게 먹었다.
케이크는 커피와 먹으려고 했지만, 초코펜이 다시 생각났다.
물을 끓여 초코펜을 녹이고, 케이크 위에 ‘생일 축하’라고 썼다.
글씨까지 얹은 케이크를 보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이틀 전 배달 음식은 먹고 나서 ‘왜 시켰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풍족했다.





식사를 마친 뒤 “이제 뭘 할까?” 고민했다.
계속 계획만 세웠던 머리띠 만들기를 드디어 해보려 했지만, 배가 부르니 그냥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브런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케이크를 떨어뜨린 게 싫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오늘 하루를 대충 보냈다는 생각이 싫었다.





나 생일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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