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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워킹맘 Jul 11. 2024

Part 3. 중국 해외파견 선택

L그룹 최연소 최저경력으로 해외파견 가다.

회사에 입사할 때는 나를 무시하는 엄마아빠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이곳에서 일할 명목을 찾아내려면 보통의 대기업들은 해외에 지사들이 있다.


사실, 생산직으로 입사한 나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까 싶기도 했다.

내가 유학하고 전공한 중국어를 마음껏 유창하게 사용하며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주어지는 것.


세상 단순한 거 같지만 어찌 보면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10년 이상 일하면 그 기회가 한번 찾아올까?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입사하고 입사교육을 2주간 받고, 중간에 탈락해서 집에 가는 동기동생도 보았다.

생각보다 긴장감 속에 2주를 보냈었다.

그러고 나서 같은 조 동기들은 대다수 생산라인으로 갔는데, 나랑 면접을 같이 봤던 동기언니 한 명 나와 이름도 거의 똑같은 그 언니와 내가 유일하게 단둘이 같은 공장에 같은 부서에 배정이 되었다.


끈끈한 동기애.

그렇지만 시프트 근무 4조 3교대라 언니와 나는 각각 조가 앞뒤라 교대할 때 빼곤 절대 만날 수 없는 조로 나뉘었다.


나는 A조 언니는 B조.

성도 같고, 이름은 서로 두 글자를 뒤집어 놓으면 각자 이름이었다.

신기한 인연이었는데, 그 끝으로 사실 만나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


여차저차 이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동안 각자 적응을 하며 지내게 되었고, 나는 중국어를 한다는 건 우리 부서전체가 알고 있었다.


아! 면접 때를 기억하는 가? 내가 분명 합격하면 모듈로 입사하게 될 거라는 그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곳이었다.

모듈도 몰랐지만 난 전혀 미지의 세계로 배정받았다.

심지어 관리자들도 여기 분야는 잘 몰라서 여기는 그냥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만 하는 그런 곳이었다.

사수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물어물어 해낼 수도 없는 그곳.


다시 생각해도 지옥 같았다.

기숙사는 닭장 같았고, 시프트 근무 때문에 텃세 부리기 일쑤였다.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 씻고 준비를 하고 나와 출근을 해야 했다.

어느덧 같은 부서지만 JOB이 다른 선배와 친해져서 같이 출퇴근을 했었다.

나의 고충을 그래도 잘 들어주던 선배.

나이는 한 살 차이지만 경력으론 나와 기본 4년 이상 나던 선배였다.


그렇게 지옥 같은 이 세계를 묵묵히 버티길 1년이 지났던가?


갑자기 항간의 소문이 들린다.

중국에 새로운 공장이 지어지는데 그곳에 우리도 기회가 있어서 파견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력들이 있는 선배들이 가게 되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관리자 분들이 그리고 부서의 선임선배들이 나를 강력 추천 했다고 했다.


중국어능통자가 여기 있는데, 말도 안 통하는 선배들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걸까?

생각보다 너무 설레면서도 내가 안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참 가득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가 나온 지 3개월이라는 기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

나 갈 수 있는 거 맞아? 나 탈락한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을 비워버렸다.


그러다가 야간근무 하던 어느 날.

관리자님이 불렀다.

조용히 사무실로 오라고 아무도 모르게.


내가 보던 라인을 잠깐 맡기고 사무실로 갔다.

관리자 : OO 너, 중국어 잘하제?

나 : 전공이니까요.

관리자 : 그래서 너를 내가 추천했다 아이가.

나 : 아 정말요? 결과 나온 거예요?

관리자 : 내가 누구가? 그래도 힘이 좀 있잖아.

나 : 아네….( 속으로 웃었다 )

관리자 : 아마 한두 달 내로 그 부서로 빠지게 될기다.

나 : 그러면 제가 하는 일을 어떻게 돼요?

관리자 : 그래서 니 하는 거를 OOO 니랑 친하지? 금마한테 맡길까 하는데.

나 : 진짜요..?

관리자 : 인수인계 잘하고 가래이. 그리고 가기 전에 자료를 중국어로 좀 만들어보래이.


그래서 나는 틈틈이 교육자료들을 중국어로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뭔가 이곳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전까지는 부속품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뭔가 내가 이러려고 이 회사에 들어왔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열심히 자료를 만들어서 관리자에게 줬더니, 누구나 다 내가 만든 자료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싹 다 자기 이름으로 바꿔서 보고를 올렸더라.


이게 말로만 듣던 대기업에서 성과 가로채기였던 것.

그걸 내가 어린 나이에 겪게 될 줄이야.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게 현실임을 그때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더럽고 치사했다.

잘 먹고 잘살고 있으려나?






그렇게 나는 1년 반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일을 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중국어가 가능한 나는 300명 되는 중국인들 앞에서 통역 없이 교육하고 강의했다.

경력도 짧고 한국에선 별 볼 일 없던 내가 중국에 와서는

날개를 단 것 같았다.

몇 장 없는 그 시절 사진들.


회식을 가면 임원분들 바로 옆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나의 비자 문제가 있었다.

중국 당국에서 나의 경력이 과연 중국으로 와서 무슨 노하우와 기술을 전술해줄 수 있냐며 취업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서 상용비자로 한 달에 한번 홍콩이나 마카오를 다녀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나의 고충을 CPO님께 말씀드려 주셨다. 그러니 일사천리로 진행된 나의 비자문제. 그렇게 나는 중국에서 취업비자를 받아낼 수 있었다.


정말 대기업의 여러 가지 면모를 압축해서 다 겪은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런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에게 빛나는 20대를 보내게 해 준 고마운 성과이기도 하다.

지금에서야 나를 아는 사람들은 종종 묻곤 한다.

그렇게 잘 나가고 좋은 회사 왜 나왔냐고.


뭐든 남들 눈에만 좋으면 뭐 한가.

내 눈에 좋아야지.

다 각자의 이야기와 사연과 이유가 있는 거지.

이제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그 마음을 어찌 다 알겠는가.

아무도 모르지.

그저 그때를 떠올리며 추억거리가 있다는 게 좋은 거지.

짧디 짧았던 경력아래 이런 패라도 남겨 있다는 게 값지고 신기한 경험이라고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면 그게 무슨 경력이야 싶은 기간에도 이렇게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시작이 두렵고, 보잘것없다 느끼지 말고 해 보는 거다.

그게 모여 결국 큰 산을 이루고 큰 성과를 이뤄내는 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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