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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워킹맘 Jun 27. 2024

Part 1. 대학 전공 선택

일본년이 왜 일본어과가 아닌 중국어과를 선택했는가?

우리는 태어나면 자연스레 초중고 과정을 거쳐 대학진학이라는 첫 번째 목표를 향해 20년을 달린다.


막연하면서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대학을 안 간다는 건 사실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응당 누구나 다 대학을 가는 시절이었다.


요즘은 자기가 선택해서 안 가기도 하지만, 왠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가득했다.


학창 시절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원하는 과목이 아니면 책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중 나는 제일 좋아하던 과목이 중학교 때부터 ‘일본어’였다.

처음 일본어를 학교에서 접하게 되고 난 뒤 당시에 일본어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방과 후 수업인 JLPT 4급 수업까지 참여할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의 장래희망은 ‘일본어선생님’ 이였다.

뻔하디 뻔한 장래희망 스토리.


그렇게 중학교 3년 중에 일본어는 교과목이 1년밖에 없었지만 그 1년이 무언가 나에게 흥미를 일으키고 장래희망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에는 다행히 ‘일본어’가 2학년 때 교과목에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하반기쯤. 엄마한테 일본어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고 졸라 겨우 등록을 했다.

왜냐면 겨우 등록을 했냐고? 나는 삼 남매 다둥이집의 첫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집안이 부유하진 않아서 늘,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요구하다 보면 항상 듣는 말은 “너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순 없어. 동생들도 생각해야지.”라는 답변이었다.

그러니 일본어학원에 등록조차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얼마나 하고 싶고 원하고 간절한지에 대해 엄마에게 호소해서 설득을 했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냥 관둬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일본인 선생님과 기초부터 시작해서 능력을 원장님께 인정받아 JLPT 1.2급 준비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급 때부터 같이 수업을 들었던 고등학생 오빠와 사회인 언니랑 재밌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JLPT 수업을 들어가니 웃는 날보다 전자사전과 책과의 씨름이었다.

그렇게 계속 책하고만 씨름을 하니, 방학 때마다 모집된 인원끼리 일본에 연수 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엄마를 데리고 학원에 와서 원장님과 상담을 맡겼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래도 엄마는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의 벽이 너무도 컸다. 그때 당시 한 달 정도 다녀오는데 숙박이며 교육이며 기타 등등 해서 천만 원을 준비하라는 거였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나는 걱정이 들면서도 내가 너무도 간절하니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필 왜 엔화도 가장 비쌀 때에 가겠다고 난리냐며 나는 유난스러운 딸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죽어도 안 보내 주는 아빠에게 보란 듯이 시위를 했다. 단식투쟁. 집에선 한 끼도 안 먹었다. 한 공간에 있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바깥에서도 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입맛이 없으니 무얼 먹든 꼭 체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기에 거의 최소한의 먹을 양만 먹고 안 먹고 다녔던 것 같다.

내 기억엔 학교 급식만 먹고 저녁은 패스할 때가 더 많았다.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겸상은커녕 마주치지도 않았다.

밤늦게 들어가고 새벽 일찍 나와버리고,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성인이 아니라서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현실.

20살이 되면 이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며 살아가리라.

그때 마음에 깊이 새기고 단단하게 세웠다.




그렇게, 좌절을 하고 고2가 되었을 때 일본어 과목이 있었고 나는 1.2 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모두 100점 만점.

수행평가도 그렇게 만점을 받고 교과우수상까지 받았다.

고2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은 모두 나에게 ‘일본년’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때에 처음으로 반에서 “일본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5분 10분 만에 문제 풀고 시험 시간 내내 잠들고는 100점을 받는 걸 보고 내 시험지로 늘 채점했다.


그런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왜냐면 나는 전교 1등을 해본 적 없지만, 일본어로는 전교 1등을 해봤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가면 전공도 일본어로 하고 싶었다.


고3이 되어 취업을 할지, 진학을 할지 기로에 놓였을 때에 왠지 대학교는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취업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이제 수시를 넣었는데 다 탈락했다.

일본어 외엔 다른 성적은 물 보듯 뻔했다.

정시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수능은..?

어떻게 준비하나 막막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었겠나?

그냥 또 매번 보는 것처럼 똑같이 봤다.

그렇게 수능까지 치르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가 공부를 했어야 하는 이유를 조금은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 같다.

전문대학들을 쭉 정시에 넣을 학교들을 추려서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일본어과에 대한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내 성적으로는 도저히 어려울 것 같아서 차선책으로 중국어과도 같이 넣었다. 왜 뜬금없이 중국어과였냐면, 일본어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여러 언어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N개국어능통자가 되고 싶었었다.


그래서 대학 2년이면 언어 하나쯤은 충분히 마스터하겠지 하는 생각에 차선책으로 비슷한 한자를 사용한다고 생각되는 중국어과를 선택해서 넣은 거였다.


그때 당시 K전문대 H전문대 S전문대 기억나는 건 이 세 곳.

K는 야간 일본어과였고, H는 관광중국어과, S는 비즈니스중국어과였다.

그 당시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K와 H는 집이랑 너무 머니까 집 가까운 게 최고라며 S전문대로 가라고 했다.


단순히, 대학을 정하는 이유가 집이 가까운 곳이라니.

나에겐 전공이 중요했는데 어쨌든 내가 대학교에 가서 중국어 공부도 하겠다는 생각에 지원한 거 아니냐며, S전문대가 아니면 등록금과 입학금은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엄마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마음은 차라리 관광중국어과가 있는 H전문대를 가고 싶었는데,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이곳으로 가야 했다.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고 입학과 개강이 시작되고 나니, 학교에 온 동기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접했던 경험들이 있었다. 더 나아가 유학생 출신도 있었다. 아직도 의문인 건 유학생 출신이 굳이 4년제를 안 가고 왜 우리 학교에 왔던 걸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렇게 나는 경쟁이 시작되었는데, 너무도 생소한 중국어. 한자 병음 성조 모두 다 처음 듣는 외계어였다. 일본어과를 갔어야 했던 건가.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스쳤다.


잘하는 걸 했어야 했는데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해서 이 고생일까 싶었다. 한자를 보면 후리가나가 떠올랐다.

한 번은 田中(중국어 : tian zhong 티엔쫑) (일본어 : 다나카 ) 이걸 나도 모르게 다나카라고 자신 있게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했다.


무섭기로 유명한 교수님 수업에 티엔쫑이 아닌 다나카가 웬 말인가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 제대로 찍힌 듯했다.


발음도 굉장히 예민하셔서 똑바로 하지 않으면 인상을 바로 쓰시는 아주 무서운 분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학기 중에 교수님 면담이 있어서 방에 찾아가 면담하는 날이었다. 학교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상담하는 거였는데, 나는 그때 무슨 결심에서였는지 중국어는 나와 맞지 않아서 자퇴를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교수님께서 “너 그래. 일본어 하던 애지?”라고 이야기하셨다. 순간 멈칫했다. 어떻게 아신거지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숙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왔는데, 나도 그때 당시 일어일문을 갈지 중어중문을 갈지 고민하다가 중어중문을 왔는데 오히려 잘한 선택이었어 “라고 하시는 거였다.


이유는 훨씬 중국어가 매력적이라는 거였다. 나는 그때는 그 말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다. 마냥 어렵기만 하고 외계어 같은 이게 어찌 매력이 있는 언어라는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뼈 때리는 말을 하셨다.


“근데, 너 죽을 만큼 노력해 봤어? 그냥 어렵다고 자퇴한다는 게 말이 돼?”라고 하신다. “안 맞는 거 같아서 일찌감치 그만 두려 합니다. 지금 그만두어야 등록금 반환도 돼서 제가 그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라고 하니 ”네가 죽을 만큼 해보고 안되면 그때 나를 다시 찾아와 그래도 안된다면 그땐 내가 사비로라도 너 등록금 반환시켜 줄 테니까 “라고 하셨다.


어렴풋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었을 때, 적성에 맞지 않은 대학전공을 선택했던 선배들 중에 일찍이 자퇴를 하고 필리핀 같은 곳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훨씬 더 괜찮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 또한 전공이 맞지 않는 거 같으니, 일찌감치

관두고 나도 새로운 곳으로 어학연수라도 떠나볼 참이었다.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이때 당시, 이런 선택을 하려고 했었다는 걸 모르신다. 굳이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걸 보면 굉장히 놀래지 않을까 싶다.


10년도 그냥 훌쩍 넘은 그때 그 상황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렇게 나는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밤새 눈뜨고 눈감아서도 24시간을 내리 중국어만 들었다. 집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왜 그걸 소음처럼 틀어놓고 있느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아빠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데 왜 그러냐 내버려두어. 잘하고 있는데.”라고 하면서 꼭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직도 그때 무슨 마음으로 내편을 들어줬는지 모르겠다. 돈 때문에 앞 길을 막은 것 같아 미안함에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하는 걸 두고 싶었던 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 해 여름 방학에 한 달 만에 HSK3급을 취득했다.


그렇게, 1학년 2학기에는 중국 현지대학에서 교생 실습을 우리나라 우리 과에 와서 하게 되어 그때 조금씩 회화연습을 하면서 중국인들과 학교 이외 시간에도 주말에도 함께 서울등을 돌아다니며 언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2학년 1학기 시작을 나는 중국에 있는 대학교로 갈 수 있었다. 유학생활의 문이 열리기 시작된 거였다. 이때 나는 중국으로 오기 전에, 엄마아빠에게 “고등학교 때 일본에 안 보내줬으니 이제 20살 넘었고 나는 성인이니 내가 돈 벌어서 중국으로 갈 거야”라고 통보했다. “너무 위험할 거 같은데, 괜찮나? 중국은 아무래도 치안도 잘 안되어 있고..”라고 했지만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이 집만 벗어날 수 있다면 너무 나에겐 “행복”이었다. 첫째로써의 책임감과 집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 첫 독립의 시기.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학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수당을 그때 당시 가장 많이 받는 이마트에서 베지밀 시음행사를 시작으로 내 몸값을 올려가며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건 여담이지만, 베지밀을 팔고 있는 나의 모습을 가족들이 보러 온 적이 있었는데, 동네에서 그냥 장을 봐도 되는데 굳이 내가 일하는 곳까지 와서 장을 보면서 내가 팔고 있는 베지밀도 카트에 한 상자 담았다.


시간이 흐른 후 아빠가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 그 모습이 아빠에겐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눈물이 났다고 술을 먹은 날이면 몇 번을 나에게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나도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괜찮은데 말이다.




그 고된 과정들을 겪어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어린 나이에 해외에 대한 목마름 결핍이 있어서 해낸 결과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유학생활은 생각보다 순탄하진 않았지만 나는 또 나에게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을 남기게 된다.


바로 유학생 말하기 대회.

여러 외국인 유학생들과 경합을 벌이는 건데, 각고의 노력으로 부족한 실력으로 참가를 했다. 거의 한국인 대표나 마찬가지였다.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지에서 잘 나대지 않는다. 하지만 난 달랐다. 그게 무엇이든 경험하고 부딪히는 게 바로 내 스타일이다. 그렇게 나는 당당하게 보란 듯이 대회에서 3등을 했고, 그 결과 위에 사진처럼 대표로 대회에 출전을 했었다.


중국으로 간지 불과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꽤나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그때 당시에 외국인들이 하나 같이 나를 이상한 한국인이라 불렀다. 한국인 특성상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끼리만 놀고, 외국인과 친해지기를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런데 나는 아프리카 카메룬 친구와 베스트프랜드가 돼서 늘 함께 하는 걸 보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한국인들과 있다 보면 내가 언어도 계속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이 한국어를 쓸 수밖에 없을 상황일 것이다.

그러면 굳이 이곳에 온 이유가 흐릿해질 것만 같아 조금은 독하게 마음먹고 자발적 따돌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외국인들과 친해지는 걸 택했다.

이 친구가 바로 내 베스트 프랜드다. 대회에 참가해서 예선전을 치르고 중간중간 작은 대회들과 리허설에서 만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이 친구는 내가 타는 버스 앞에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되냐는 친구. 그렇게 나는 2016년도 까지도 중국에 가서 만나고 했다. 이후엔 내가 결혼하고 임신 출산을 하며 못 만나기도 하고, 코로나를 겪으며 더욱이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에 지금 또다시 이슈가 되어가고 있는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가 있었다.

정말이지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전공을 선택하던 당시에 일본어를 선택했다면 아마 그때에 나는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때 당시에 세계 뉴스도 잘 접하기 어려운 중국에서 생활만 하다 보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알 길이 없었다. 오로지 현재의 생활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뉴스로 소식을 접한 엄마아빠는 skype로 전화를 다급하게 걸어서 일본의 소식을 전해주며 “그러길래, 일본어 안 하고 중국어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말을 하며, 그때 반대를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하는데, 마치 그 반대가 합당하고 합리적이었음을 무언가 확정 짓는 것만 같아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러면, 반대를 할 때에 이런 것까지 예견하고 반대를 한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그때 내가 원하는 걸 하지 못하게 했다는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상처로 남아있다.


하지만 인생이 늘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기에 그때 틀어진 길로 나의 또 다른 선택이 아니었다면 이런 인연들도 이런 경험들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원하는 길이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선택들이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드는 과정인 거다.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고 원치 않은 선택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살면서 나는 그때 그 실패로 인한 다른 선택들이 소중한 마음의 자산 경험들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늘 가슴속에 추억하고 간직하며 그때의 그 순간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추억한다. 결국 순간의 선택들이 불러오는 그 효과와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하는 엄청난 결과들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게 모두 나쁘기만 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좀 더 원하는 쪽으로 갈 수 있게 방향을 잡고 전진해 보는 거다.


20살에 전공을 포기하려고 했던 나에게 머리를 한 대 크게 때려주신 교수님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아마 그때 자퇴를 했다면 이런 경험도 앞으로 내 인생에서도 중국어와는 영원히 굿바이 할 뻔했으니 말이다.


언어 하나를 배운다는 건, 인생에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을 장착하는 것이다.


한국어만 했다면 한국 사람들 하고만 소통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대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나의 전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원하는 걸 지금 당장 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혹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더라도 어떻게든 또 다른 방법들을 찾아보고 차선책이라도 선택해서 개척해 보길 바란다.


분명 생각지도 못한 좋은 결과들이 따라올지 모를 테니 말이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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