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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un 16. 2023

피해의식과 마주하는 연습

 똘이는 각성조절이 잘 안 된다. 


 '각성'이란 말 그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잠에서 덜 깨어 정신이 멍 한 상태를 각성이 낮은 상태라고 하고, 정신이 너무 쨍-하게 깨어있는 상태, 예컨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머리가 어지러운 등의 불편함을 느끼는 상태를 각성이 높은 상태라고 말한다.


각성조절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각성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상태라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각성상태를 유지하지 못한고 지진 주파수처럼 각성이 오르내린다는 의미다. 



 똘이는 각성이 낮을 땐 눈 뜨고 잠을 자는 아이처럼 멍하고 초점이 없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각성이 너무 높을 땐 흥분도가 조절이 안되어 높은 곳에서 폴짝폴짝 뛰어내리거나 옆 사람을 밀거나 왁!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문제행동을 한다. 


 이런 문제로, 1년 전부터 똘이의 어린이집으로부터 이런저런 전화를 받곤 했다.


2년 전의 똘이는 어린이집에서 그 어떤 민원도 받지 않았다. 또래에게 아예 관심이 없고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종이에 숫자를 쓰다 오거나, 알파벳이 적힌 책만 읽다 오기 일쑤였다. 친구들과는 접촉 자체가 없었기에 원에서 안 좋은 피드백을 받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치료의 성과인지 똘이가 성장한 건지 언제부턴가 조금씩 또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으로선 그게 놀라운 발전이고 성과였고 기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관심은 생겼으나 언어도 인지도, 무엇보다 사회적 기술이 너~무도 부족하여(치료사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사회적 기술이 3~4살 수준이라고...)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도 또래 놀이에 낄 수도 없는 것이다. 또래에게 관심이 생겨도 여전히 외톨이인 똘이는 친구들의 장난감을 무너뜨리거나 관심 있는 친구 주변을 맴돌거나 친구들을 툭 툭 때리는 식으로 친구들의 관심을 끌어내려했다.(친구들에게 물리적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친구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할 만한 문제 행동을 한다.) 그때부터 원에서의  부정적인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다른 아이들 입장에서 얼마나 불편하고 또 불쾌할까.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엄마 입장에서도 자녀가 집에 와서 ㅇㅇ이가 자꾸 불편하게 한다거나 괴롭힌다고 하면 얼마나 화나고 속상할까. 선생님도 그걸 일일이 말리고 훈육하고 중재해야 하니 얼마나 힘드실까.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를까.


다 우리 똘이의 잘못이다. 어린이집에 똘이를 데리러 갈 때면 나도 모르게 허리가 굽어짐을 느낀다. 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달고 산다. 똘이도 “미안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열에 여덟 아홉은 똘이의 잘못이지만 아주 가끔, 자기가 피해를 본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미안하다고 한다. 


자기 혼자 뛰고 굴리는 건 그렇다 치고 옆의 친구를 건드리는 건 명백한 잘못이니 나 역시도 볼 때마다 주의를 준다. 우리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가 불편을 겪고 있으니 당연히 사과하는 게 맞고 아이가 원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것도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똘이가 너무 불쌍하다. 우리 똘이는 고의로 친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이 너무 낮고 각성조절이 미숙하고 충동성 조절도 힘들다. 자기 딴에는 친구랑 상호작용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신의 방식(물론 잘못된)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 똘이에게 친구들을 건드릴 때마다 “하지 마!”, “안 돼!”라고 하는 것은, 이 아이에겐 친구를 사귀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의미일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하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안 돼,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똘이는 그 행동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 행동’ 대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무리 가르쳐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지 못한다. “친구 밀지 말고 사이좋게 노는 거야.”라는 쉽고 당연한 말은, 똘이에겐 너무나 막연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말이다. 


몇 달 동안 똘이에게 “같이 놀자!”라고 말하는 걸 가르쳐서, 똘이는 이제 “같이 놀자.”라는 말은 곧잘 한다. 하지만 어떻게 ‘같이’ 놀아야 하는지, 어떤 놀이를 어떤 규칙으로 어떤 대화를 하며 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 당연히 친구들도 끼워주지 않는다. 


똘이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하다. 



어제는 키즈카페에서 어떤 아이의 엄마가 똘이의 어깨를 잡고 화를 냈다. 똘이가 자기 아이를 두 번이나 밀었기 때문이다.


똘이는 보통 키즈카페에 가면 신이 나서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주로 앞을 안 보고 뛰다가 놀이기구에 몸을 부딪히거나 자기 발에 걸려 자기가 넘어지거나 하는 식이다. 어쨌거나 아이는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흥분도가 너무 올라가면 친구들을 툭툭 건들기 시작한다. 


“왜 밀어? 왜 말을 안 해? 친구를 민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상대 아이의 엄마는 똘이의 어깨를 꽉 잡고 앙칼진 소리로 말했다. 똘이는 그런 식으로 다그치면 더더욱 눈을 안 마주치고 상대의 시선을 회피하며 일부러 깔깔 웃는 식으로 반응한다. 곤란한 상황을 늘 웃음으로 회피해 버리곤 하는데, 혼나는 상황에서 어떤 반응이 적절한 반응인지 아무리 가르쳐도 아직 모른다. 아이가 회피 반응을 보이자 그 엄마는 좀 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웃지 말고 말을 해. 왜 친구를 미냐고! 이유도 없이 밀었어? 어?”


보다 못한 내가 모르는 척 “무슨 일이야.”하고 다가갔다. 그 아이의 엄마는 자기가 똘이의 어깨를 잡고 다그치는 상황에서 내가 나타나자 흠칫 놀라긴 했지만, 이내 “얘가 우리 애를 자꾸 밀어서요.”라고 말했다. 멀찍이서 그 애 아빠가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아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조금 느려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자기 조절력이 미숙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해요. 똘이도 미안하다고 해.”

똘이는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아직 파악도 못한 눈치였지만 어쨌거나 “미안해”라고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친구야, 앞으론 그러지 마.”

내가 예상보다 더 저자세라고 느꼈는지, 아이 엄마는 갑자기 톤이 부드러워지며 자기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화나는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나라도 속상하고 짜증 났을 거다. 똘이가 잘못한 거니까 똘이와 내가 사과하는 게 맞다. 하지만 불쑥불쑥 이런 기분이 치고 올라온다. 


‘왜 남의 애 어깨를 잡고 다그쳐? 지가 선생님이야, 똘이 엄마야 뭐야? 애가 잘못을 하면 애 엄마를 찾으면 되지 왜 남의 애 어깨를 잡고 화를 내?’

여기서 끝나면 되는데, 망할 놈의 피해의식은 날 더 멀리로 몰고 간다.


‘지 자식은 멀쩡하니, 느리고 부족한 아이 낳은 엄마나 그 아이의 마음은 영영 모르겠지. 니 자식이 멀쩡하니 넌 사과하고 다닐 일 없어서 좋지? 네가 잘 낳고 잘 키워서 그런 거 같니? 아니야. 넌 그냥 뽑기 운이 좋은 거야. 


우리 똘이는 뭔 죄를 져서 항상 여기저기서 혼나고 욕먹어야 돼? 얘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얘는 그냥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야. 악의라곤 조금도 없는 꼬맹이일 뿐이라고. 얘도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앤 데 왜 남의 애 자존감을 그렇게 깎아내리는데? 

얘도 타인에게 피해 안 주고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일주일에 10시간씩 멀고 먼 센터에 다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황에 적절한 말을 외우고 연습한다고. 네가 이 애와 나의 노력을 알기는 해? 


난 안 억울한 줄 알아? 내가 뭔 죄를 져서 이렇게 사과를 하고 다녀야 돼? 이게 내 잘못이야? 왜 이게 다 나의 몫이야? 느린 아이를 낳은 게 내 죄야? 왜 나만 맨날 죄인이야?’ 



마주하기도 부끄러운 못난 마음들이 불쑥불쑥 가래처럼 밀려 올라온다. 부정적인 생각에 꼬리를 한번 잡히고 나면, 이렇게 끝없이 끝없이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똘이도 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우리는 어쩐지 점점 뒤처지고 점점 소외되는 것만 같다. 

똘이가 자라는 시간보다 세상의 시간이 늘 더 빠르다. 똘이는 그대로인데 똘이의 나이만 점점 늘어나면 어쩌지. 지금은 ‘어려서’ 용서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점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는데. 학교에 가서도 천둥벌거숭이처럼 친구들을 건드리고 다니면 어쩌지. 매일매일 선생님께 구박만 받으면 어쩌지. 질 나쁜 친구들에게 걸려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지....



STOP.

더 가면 안 된다.

느린 아이를 키워온 몇 년간의 경험상, 부정적인 생각은 빠르게 끊어내야 한다.

얼른 정신줄을 붙잡고 멈춰야 한다. 

백해무익한 생각들. 

이런 생각들이 나를 잡아먹게 두면 안 된다. 


피해의식에 잡아먹힐 것 같을 때면, 세수를 하고 좋은 음악을 틀고 따뜻하고 달콤한 차를 마시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그건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해롭다. 상대방에게 너의 상황을 이해해 줘야 할 의무는 없다. 각자에겐 각자의 고통이 있고 세상 모두가 각자의 삶과 싸우고 있다. 


저 사람도 악의는 없을 거다. 똘이가 잘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듯, 저 사람도 느린 아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다.  똘이가 느린 아이라 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사회에서 무리 없이 어울려 지내려면 어쨌거나 똘이의 문제행동을 고쳐야 한다. 그 과정의 고단함은 나와 똘이가 감내해야 한다. 내 속상함은 나의 몫이고, 똘이를 가르치고 단속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이런 일들은 나를 괴롭히고 상처 내려고 내게 온 것이 아니다. 내 내면을 더 부드럽게 다듬어줄 사포라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단금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과정들이 나에게 단순히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니라, 겪어 보지 않은 일을 감히 단정 짓지 않게 하고, 타인의 삶에 예의와 존중을 갖추게 하는 훈련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자.


느린 아이를 낳은 게 나의 운이라면, 똘이가 나를 만난 것도 똘이의 운일 거다. 나는 때때로 내가 불운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는 운이 좋다 생각한다. 나를 지지해 주고 일으켜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똘이가 때로는 밉지만 단 한 번도 똘이가 다른 아이이길 바란 적은 없다. 

너를 낳은 건 나의 운이지만 너는 나의 운명이니까.


똘이가 다른 엄마가 아닌 나를 만나서, 좀 더 사랑받고 좀 더 다듬어지고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또한 다른 아이가 아닌 똘이를 만나서, 오만과 아집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살아 보지 않은 삶을 대할 때 좀 더 낮은 자세와 너른 시선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이, 나에게도 똘이에게도 행운이 되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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