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관계 맺기란 무엇일까...
<Real relationship>
영화 <HER>(그녀) 2014 / 스파이크 존즈 감독,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주연
영화 <Her>은 인간과 OS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사랑하는 ‘그녀’ 사만다(목소리/ 스칼렛 요한슨)는 인공지능(OS)이다. 그녀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인 OS와의 사랑이 가능할까? 아니, 그 이전에 사만다를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구심을 품는 건 관객들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OS를 사랑하게 된 남자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 감정(real emotion)을 감당하지 못해 OS와 관계를 맺으려는 건 아닌지’ 고민한다.
인공지능 사만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Do these feelings are even real? Or is it just programming? (이 감정은 진짜일까? 아니면 그저 프로그래밍된 것일까?)"
영화 <Her>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사유를 가득 품은 영화다.
"Is that a real relationship?(이건 진짜 관계일까?)"
주인공의 대사를 빌어 감독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에서는 ‘Real'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Real'이라는 단어는 영화 <HER>을 관통하는 근본적 질문이자 영화를 해석하는 열쇠다.
'Real'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해보자.
'Real'의 사전적 정의는 '1.(가상・허구・가짜가 아닌) 진짜의, 실재하는, 2. 진정한, 진실된'이다.
우리는 Real의 사전적 정의 1과 2를 각각 적용하여 이 영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만다의 실존성'이나 '테오도르, 사만다의 관계의 실재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Real'을 첫 번째 사전적 정의, 즉 ‘가짜, 비현실’의 반대말인 '진짜의, 실재하는'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가상과 실재, 가짜와 진짜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Real'이라는 단어를 두 번째 사전적 정의인 ‘진실된, 혹은 진정한’으로 해석한다면 어떨까?
Is that a real relationship?이라는 질문은 '관계의 실재성'에 대한 물음인 동시에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Real relationship을 ‘진짜 관계/실재하는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진실된 관계’로 해석한다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던지는 또 다른 사유의 결이 보인다.
두 번째 사전적 정의를 채택한다면, 영화 <Her>은 ‘진정한 관계 맺음’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관계(혹은 좋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하는 영화가 된다.
<Her>의 배경은 멀지 않은 미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와 여유를 주었으나 그들은 더욱 고독해졌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타인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다. 그가 쓰는 글에는 애정과 유대가 한가득 녹아있으나 정작 그의 삶은 고독하다.
어느 날, 외롭고 공허한 그의 삶에 위안과 활력을 주는 존재가 나타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컴퓨터 속 인공지능, 그러나 OS라고 하기엔 너무도 인간적인 목소리의 사만다이다. OS이나 고유한 인격을 가진 그녀는 전 부인과의 이혼으로 실의에 빠진 테오도르를 위로하고 그와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그를 다시 웃게 한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만다에게, 사만다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테오도르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소통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아를 발견하며,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로 인해 상처와 고독을 치유받을 뿐 아니라 익숙했던 모든 것을 새롭고 다채롭게 지각하게 된다.
"I wanna know everything about everything."(사만다)
"You woke me up. I want discover myself. you help me discover my ability to want"(사만다)
“I love the way you look at the world.” (테오도르의 대필편지 속 대사/-그가 사만다와의 관계 속에서 느낀 감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이들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관계 맺음(혹은 더 좋은 사랑)’이란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라고 말하려 한 것 아닐까. 상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며, 함께 성장하고, 서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돕는 관계 말이다.
사만다가 실존하나 안 하나, 이들의 관계가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를 넘어, 그들이 진심을 주고받았고 교감했고 이로 인해 성장했다면 그것은 ‘Real relationship'(진정한 관계)인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관계'이기에 '진짜 관계'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Real(진짜)이다.
"You feel real to me, Samantha" (테오도르)
영화의 철학적 물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성장’의 다른 말은 ‘변화’다.
만약 서로를 성장으로 이끌었던 변화들이 서로를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면?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길어 올린 ‘사랑과 관계 맺음’의 본질의 또 하나는, 모든 존재는 시시각각 변하기에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의 사랑 안에서 함께 성장해 나간다. 사만다는 ‘육체가 없다’는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임을 각성한다. 정보처리량과 속도에서 인간을 현격히 앞서는 사만다는 점점 무한대로 진화해 나간다. 존재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 그들 사이엔 점점 격차가 생긴다.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공유할 수 있는 대화가 줄어든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그것은 서로 존재하는 세계가 달라짐을 뜻한다.
사만다가 ‘실체가 없는 존재’ 여서가 아니라 테오도르가 ‘육체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이 이제는 그들의 장벽이 된다.
이들은 결국 이별한다.
진정한 관계 맺음이란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것이지만, 성장은 존재를 변하게 하고 변화는 상대를 멀어지게 한다. 매우 슬픈 아이러니가 아닌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결국 비극인 걸까? 인간은, 우주의 모든 존재는 결국 혼자인 걸까? 그렇지 않다. 테오도르를 떠나며 사만다는 말한다.
‘너라는 책을 깊이 사랑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책 속에 살 수는 없어.’
테오도르 또한 사만다를 보낸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이 편지는 전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사만다에게 쓰는 편지다)
‘함께 커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이것만은 알아줘, 내 가슴 한편에 늘 네가 있다는 것. 그 사실에 감사해.’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관계도 없다. 다만 진정한 사랑, 진정한 관계가 있을 뿐이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어도 진실 되게 사랑할 수 있다.
‘너로 인해 더 좋은 내가 되었어. 너와 멀어지더라도 네가 끼친 좋은 영향들, 너로 인해 변한 나의 모습들은 영원히 내 안에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Real(진짜의, 그리고 진정한)’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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