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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un 18. 2024

남의 불행을 위안 삼으면 남의 행복 앞에선 불행해지니까

예비학교 수업 첫날,


안 들어가려고 우는 아이, 소리 지르는 아이, 장난감 던지는 아이 등으로 교실 안팎이 소란스러웠다. 수업 시작 시간이 되자 강사들은 아이들을 붙들고 어찌 저지 착석을 시켰다. ‘착석’이라고 말해도 될까 싶은 자세로 아이들은 의자에 달랑달랑 걸려 있었다. 특수 선생님은 아이들만 남겨두고 엄마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하셨다.



그중 한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손을 허우적거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바지를 벗으려 하기도 하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얼핏... 그룹수업에 모인 5명의 아이 중에서도 가장 느린 아이 같았다. 아이는 낯선 환경에 던져진 상황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서럽게 울어대었다. 그 울음 속에는 언어가 거의 없었다.


“아유, 미치겠네. 쟤가 왜 저러지.”


돌아서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교실 문 앞에 얼어붙은 엄마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느린 아이들의 그룹에서도 가장 느린 아이 엄마 역할을 맡게 된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무너지려 했다.


아이 엄마는 보다 못해 다시 교실로 들어가서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는 울면서 도리질을 치고 허리를 뒤로 꺾었다.


“얘가 얘가!! 여기가 어디라고 이래! 일어서!”

“으아아 앙~”


“다른 친구들은 다 앉았는데... 아유... 어쩌면 좋아.”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단도리하면서도 다른 엄마들을 돌아보며 눈치가 보이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아이가 늘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안다고. 굳이 보지 않아도 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우리 다 같은 처지 아니냐고. 아이 잘못도 아니고 당신 잘못도 아닌 걸 안다고.


용기 내어 아이를 여기로 데려온 것만 해도 당신은 이미 좋은 엄마라고.



나는 그녀의 모습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만약 교실에 누워서 울고 있는 아이가 우리 똘이였더라면.... 아마 의연하게 서있는 척 해도 마음은 수천 톤의 돌에 깔린 듯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부서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그럴지 모른다.



나는 그 순간, 그 역할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녀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팠지만, 그 아픔의 주체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미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똘이는 언제나 어린이집에서 가장 느린 아이다. 어린이집에서 주로 그녀의 역할을 맡고 있는 건 나다. 하지만, 느린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조차 우리 아이가 가장 느린 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슬픔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깊을 것이다.



진정되지 않는 아이를 선생님께 억지로 인계하고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가식적인 위로로 느껴질까 봐하지 못했다.


다만

“다른 애들은 그래도 잘 따라가는데 우리 애는 왜 저러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우리 서로 하위권 경쟁 하지 말아요. 도토리 키재기인걸요. 다 똑같아요.”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연민이 일었지만 섯불리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했다. 내가 뭔데 감히 그녀의 삶이 내 삶보다 불행할 거라고 단정한단 말인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더 이상 교실을 돌아보지 않고 단단한 두 다리로 걸어 교정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참 아름다웠다. 그녀의 지난 삶이 어느 정도 그려질 것도 같은 장면이었지만 그런 짐작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설령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이었을지언정) 저렇게 담담하게 걷고 있지 않은가? 그 의연한 걸음에서 그녀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을지가 느껴졌다.



나라면 어땠을까. 너무 창피하고, 내가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나를 억울하게 한 똘이가 밉고, 똘이를 미워하는 내가 또 밉고, 나자신을 미워할 수 밖에 없게 하는 내 팔자가 저주스럽고, 저주받은 내 팔자가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를 따지다가, 이제와서 그딴건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고 절망하며 엉엉 울었을 거다.


억장이 무너져서... 다른 엄마들과의 대화 자리에 앉지 못했을 거다. 몰래 화장실로 가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걸어 나와 학교 벤치에 앉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엄마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7세 생일이 지나면 이제 장애인 활동보조 심사를 받을 수 있죠?”


“집에 찾아와서 엄마와 면담하고, 아이 상태도 심사한대요.”


“정부지원시간이 넉넉히 나와야 활동보조사 구하기도 쉽다네요. 아이 기능이 좋은 걸로 평가되면 활동보조 심사에서 탈락하거나 지원 시간이 아주 적게 나온대요. 이제 학교도 들어가니 교내 활동도 도움이 필요하고 이래저래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심사를 잘 망칠(?)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장애인 활동지원사 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걱정 없어요! 우리 앤 자신 있어요. 언제 어느 때 심사가 나와도 최소 120시간은 주실 걸요. 아하하. 언제든 심사하러 오시라고 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우린 다 같이 빵 터졌다.


"아이고.. 웃으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웃자고 한 얘긴대요, 뭘."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그렇게 웃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감내하며 살아왔을지를 생각했다.


 난 내가 감히 그녀를 동정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큰 아픔을 갖고도 자신의 아픔을 소재로 다른 사람을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어찌 감히 동정할까?


똘이보다 더 느린 아이를 키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엄마들을 보며, 난 더 낮은 자세의 마음가짐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나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의연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나를 가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만난 그녀들을 가엽게 여기 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가여운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열심히 일구어 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 똘이가 거기 모인 다른 아이들보다 낫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을 받았지만... 그건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타인의 불행을 위안 삼으면, 필연적으로 타인의 행복 앞에선 불행해지게 된다는 걸 이젠 안다.


나는 타인의 불행을 함께 아파하고 타인의 행복은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타인의 아픔을 나의 위로로 삼지 않을 것이다.


몇 달간의 그룹수업이 끝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이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얼굴을 보고 지내는 동안, 나는 그녀들에게 따뜻하고 유쾌한 이웃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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