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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un 16. 2023

똘이의 지연반향어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반향어

반향어란,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이 자신이 들은 말을 맥락에 관계없이 그대로 반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이름이 뭐야? 이름이 뭐야?”하고 따라 하는 행동은 즉각 반향어이고, 예전에 들은 말을 한참 뒤에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을 지연반향어라고 한다.



똘이는 지연반향어를 한다. 뜬금없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말을 한다. 요즘 똘이가 꽂힌 지연반향어는 “1은 작고 10은 커.”, “엘리베이터 타고 혼자 내려가면 안 돼.”, “똘이는 딸기를 좋아하고 형아는 바닐라를 좋아해.”,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져.” 등등이 있다.



가족끼리 있을 때야 얼마든지 괜찮지만, 똘이의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사람들이 있을 땐 조금 난감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할머니가 “안녕? 이름이 뭐니?”라고 물으면 “1은 작고 10은 커.”라고 대답한다거나, 첫째 친구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져.”라고 말해 다른 엄마들을 갸우뚱하게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이웃들도 있지만, “어른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하고 아이에게 올바른 대답을 요구하거나 “얘는 왜 이런 말을 해요?”라고 묻는 분들도 계시다. 악의 없이 건넨 말이니 그게 기분 나쁘다는 건 아니다.(사실 이런 일에 일일이 기분 나쁠 여유도 없다.) 창피한 건 아니지만 자랑도 아닌데 이럴 때마다 굳이 “아이가 자폐 성향이 있어서요.”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조금 난감하다. 때때론 상대방이 속으로 ‘내가 뭔가 실수했나' 혹은 '쟤 좀 이상한 앤가.’하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느껴져서 웃프기도 하다.




이것이 비단 나의 고민만은 아니었나 보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단톡방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한 아이의 엄마로부터 의외의 유머러스한 해결책을 얻게 되었다. 바로 그건 아이에게 “엄마, 있잖아.”라는 말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무리 뜬금없이 던지는 말이어도 “엄마, 있잖아.”를 붙이면, 마법처럼 맥락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컨대 지나가는 사람 앞에서 갑자기 “1은 작고 10은 커.”,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져.”라고 말하면 뭔가 이상하지만, 그 앞에 “엄마, 있잖아.”를 붙이면 어떤가. “엄마, 있잖아. 1은 작고 10은 커.”, “엄마, 있잖아.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져.” 갑자기 없던 맥락이 생겨나는 이 느낌!



옳거니! 하고 당장 그날부터 “엄마, 있잖아.”를 연습시켜 보았다.

“똘이야, 엄마에게 갑자기 말을 하고 싶을 때는 꼭 ‘엄마, 있잖아.’라고 먼저 말해 줘.”

똘이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금방 실천하진 못했다. 금방 실천이 되면 네가 왜 느린 아이겠니. 나는 시간을 충분히 두고 아이에게 조금씩 연습을 시켜주었다.



2주쯤 지나자 똘이는 지연반향어를 할 때 10번 중 3~4번 정도는 앞에 “엄마, 있잖아.”를 붙여주었다. 나는 똘이가 진심으로 기특한 마음 반, 이 행동을 강화하기 위한 마음 반으로 “그렇구나! 똘이가 그런 생각이 났구나. ‘엄마, 있잖아.’하고 말해주니까 엄마가 듣기도 좋고 똘이 마음을 딱 알겠어! 정말 고마워.”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럼 똘이는 또 신나서 “엄마, 있잖아. 엄마, 있잖아.”를 반복하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소소한 고민에 이 얼마나 러블리한 해결책인가.

"엄마, 있잖아" 하나면 망구땡이라니 너무 좋다.


“엄마, 있잖아.”를 알려준 엄마, 정말 칭찬해요! 고마워요!

엄마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저장해 준 우리 똘이 칭찬해! 고마워!




PS. 

2주 뒤 새로운 지연반향어가 등장하자 ‘엄마, 있잖아.’는 이제 무쓸모하게 되었다.


새로운 반향어는 바로 “쿠쿠가 백미 취사를 완료했습니다. 밥을 맛있게 저어 주세요.”이다ㅜㅜ.

똘이는 오늘도 엘리베이터에서 “엄마, 있잖아. 쿠쿠가 백미 취사를 완료했습니다. 밥을 맛있게 저어 주세요.”라고 말해 이웃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난 웃었다. 난 다행히도 똘이의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넌 반향어로 마저도 나에게 웃음을 주는 아이이구나. 그런 너를 사랑해.

“그래, 똘이야. 얼른 가서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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