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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Oct 12. 2024

한강 <소년이 온다>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이 그린 1980년의 광주 이야기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권력이 한 지역을 고립시키고 언론을 통재한 채 무고한 시민을 죽였던 80년 5월의 광주. <소년이 온다>는 그 10년 같던 열흘,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의 삶의 궤적이 구부러지던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p134


 5.18을 소재로 한 책과 영화는 많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으나 미처 듣지 못했던 현장의 목소리’를 이처럼 생생하게 길어 올린 작품은 찾기 힘들 것 같다. 아픈 역사를 이야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역사 속 아픈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온다>는 탁월하다.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안치했던 상무관의 상황과 계엄군이 몰려올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곳을 지켰던 시민군의 내면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압권이다. 공권력에 의해 죽임 당했거나(정대, 동호) 살아남았지만 죽음을 택하거나(진수) 살아있어도 죽은 채 살아가는(동호의 어머니) 무고한 시민들이 이 소설의 화자다. 시간 순이나 사건 순이 아닌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도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하는 요소다.



 그 해의 광주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한국 역사가 낳은 특수한 사건’이나 ‘악마적 리더가 전두지휘한 만행’이라기보다 ‘인류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해 온 잘못’에 가깝다. 무수한 죽음을 가능케 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깊게 회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이다지도 잔인한가라고 묻는 것 같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4”

 


소설 속에서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강 작가가 조용하게 절규하는 부분이다. 활자가 독자를 압도한다. ‘인간성’이란, ‘존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잔혹성을 끌어낸 외부의 힘이 무엇이건 간에, 이다지도 쉽게 집단 광기에 휩싸이는 것이 인간이라면, 과연 우리는 ‘인간’ 임을 긍정할 수 있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리고 계속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한강 작가가 붙든 동아줄은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발현된 깨끗한 양심’이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총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던,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 울부짖으면서도 끝끝내 의롭게 죽기를 택했던 그 곧고 정한 마음, 희생자들의 주검을 지키기 위해 계엄군이 몰려오는 상무관에 남았던 의로운 마음. 그 양심의 인력이 1980년의 광주시민들을 뭉치게 했다는 것. 그 ‘깨끗한 양심’이 다시 한번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길 긍정하게 한다고.



 우리는 어쩌면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 온 잘못된 죽음들에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살과 고문의 트라우마는 지금까지도 생존자들의 삶을 옭아매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억울한 죽음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언제든지 악에 감염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안의 '선'을 잃지 않기 위해,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슬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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