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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un 19. 2023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자라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

나는 똘이가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다.



똘이의 문제를 주변에 굳이 숨기지 않는 편이다. 

어린이집 원장님과 담임선생님께는 당연히 터놓고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했고, 내 친구들이나 친척에게도 딱히 숨기지는 않는 편이다. 평온하게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고, 대체로 내 마음도 그렇다. 나와 똘이의 불운을 유난한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냐. 나였다면 멘털이 무너졌을 것 같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무너졌었지...”라고만 짧게 대답한다. 



난 괜찮다. 그런데 사실은 괜찮지 않다. 외줄 타기에 익숙해졌기에 외줄 타기가 두렵지는 않지만, 그 줄이 곧 끊어질지도 몰라서 두렵다. 



나의 평온함이 유지되는 이유는, 내가 마음이 단단하고 너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똘이가 아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우습게도, 아직은 '남들이 얼핏 봐선 멀쩡한 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작고 못난 사람이다.



똘이는 때때로 자신의 루틴이 깨지면, 집에서든 밖에서든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나를 때리거나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주저앉는다. 엘리베이터나 식당에서 주변에 사람이 있건 없건 자신이 꽂혀 있는 반향어를 반복한다. “엄마 오늘 몇 월 며칠이야?”, “아이스크림은 몇 월 며칠에 먹어?”, “수박은 몇 월 며칠?”, “사과는 몇 월 며칠?”... 



하지만 나는 괜찮다.

내가 괜찮은 이유는, 아이의 장애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똘이가 6세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떼를 쓰고 드러누워도,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해도 남들이 보기엔 조금 늦되거나 예민한 아이 정도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똘이를 데리고 다니는데 주저함이 없다. ‘저 엄마 불쌍하다. 저 애는 뭐가 문제지?’라는 시선이 아니라, “아이고, 꼬맹아. 엄마 말 잘 들어야지.”라는 말을 들으며 다닐 수 있으니까.



‘자세히 보면 이상하지만 얼핏 보면 멀쩡한’ 나이의 마지노선은 몇 살일까? 7살? 8살? 

1~2년만 지나도 똘이는 ‘누가 봐도 이상한’ 아이가 될지 모른다. 

그것이 가장 두렵다.



그날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똘이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루하루 처절하게 분투하고 있다. 우아하고 단단한 척, 담담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론 누구보다 초초하고 분주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똘이가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태여서, 주변으로부터 ‘쟤 어딘가 이상한 거 아냐? 저 엄마 참 불쌍하다.’라는 시선을 받게 되면, 나는 지금처럼 똘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볼 수 있을까? 똘이의 손을 잡고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똘이를 부끄러워하거나 남들의 시선에 위축대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 위를 우아하게 유영하는 척 하지만 물속에서 미친 듯이 발을 휘젓고 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엄마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아이가 조금씩 나아져서 언젠가는 정상범주 언저리에 들게 되거나, 최소한 지금처럼 ‘자세히 보면 이상하지만 얼핏 보면 멀쩡한’ 수준이라도 유지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바람이 절망으로 바뀐다면, 작은 균열로 인해 터져 버리는 둑처럼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사실 나는 나약하고,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조금만 힘들어도 동굴로 달아나고 싶어지는 자존감 낮은 인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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