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 두 분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일상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모습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메모리에 그런 부모님의 모습은 없고 쉬이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대화의 자리에는 고성과 다툼, 깊은 한숨,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화난 표정의 엄마, 굳은 표정의 아빠.
아빠는 3년 전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수술 이후 마른 몸은 더욱 말랐고, 젊음이 주는 일말의 촉촉함마저 완전히 메말라 피부에도 표정에도 버석버석 가뭄이 앉았다. 아빠는 확실히 더 늙어버린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자연스레 아빠가 먼저 돌아가시리라 가정을 하고 있나 보다. 엄마가 아닌 아빠의 영정사진을 상상한 것을 보면 말이다.
엄마는 어떤 표정으로 아빠의 영정 앞에 서 계실까.
엄마의 마음엔 어떤 감정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할까.
엄마의 슬픔은 어떤 슬픔일까.
미움과 슬픔이 섞이면 무엇이 될까.
엄마와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서로에게만 나쁜 사람일 뿐.
나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스스로를 연민하며 살아왔다. 마흔의 내가 여섯 살의 나를 불러와 앞에 앉혀 놓고 가여워하다가, 어느 날은 열세 살의 나를 다시 불러다 놓고 소녀의 머리를 쓸어 만지며 눈물짓는 식이다.
정작 어린 시절 여섯 살짜리 꼬마,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는데도 마흔 살 먹은 오늘의 내가 어린 나를 불러들여 동정한다.
과거의 필름을 꺼내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이 되어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일은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이제 마흔셋의 나는 오랫동안 해온 그 일을 그만두었다. 불우하고 불화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 소녀가 주인공인 그 영화는 이제 상영 종료되었다. 옛날에 찍어 놓은 영화를 오래된 영화인채로 과거 자리에 두니 어린 내가 안쓰럽지도,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다.
나와는 달리 칠십이 넘은 엄마는 아직도 옛날 영화를 튼다.
엄마의 영화 속에 아빠는 월급의 일부를 아내 몰래 삥땅 치는 철부지이고, 부모 형제자매에겐 효자에 착한 오빠이지만 아이들 양육 문제나 이사 갈 집을 구하거나 하는 집안일엔 무신경한 남편이다. 남에게 명의를 빌려준다거나 여동생에게 이런저런 보험을 들어주는 어리숙한 남편이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 매일 술을 마시고 빵집에서 팔리지 않은 빵들을 기분 좋게 사 오는 남에게만 좋은 남의 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가져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다.
엄마의 영화 속에 여주인공인 젊은 처녀는 선 한 번 보고 낯선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울며불며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무서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한 여자다. 서울에 집도 있고 값비싼 결혼반지도 해줄 거란 중매쟁이의 말을 믿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집은커녕 월세비를 내는 것조차 빠듯하고 결혼하지 않은 시누이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는 기막힌 팔자다. 공장에서 아홉 시까지 일하고 어린 두 자녀를 챙기는 바쁜 생활 중에도 신도시 아파트를 분양받아 가정 경제를 끌어올린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아내이자 엄마이다.
남편 잘못 만나 젊은 시절 고생을 죽도록 하고 무릎 관절은 다 닳아버린 억울한 인생이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엄마의 시점에서 쓰인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나도 여러 번 보았다. 엄마로부터 나에게 여러 차례 구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궁핍에서 벗어났지만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칠십이 넘은 엄마는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이 밉고 꼴도 보기 싫다.
재미있는 건 20년 지기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집 하나 화목한 집안이 없고, 또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투는 부모와 불화한 가정이 모두의 일상에 자리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그렇다고 나의 지난 불행이 불행이 아닌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 불행과 비슷한 불행이 도처에 널렸구나.
화목이란 희귀한 것이구나.
다시 돌아와 '서로를 힘껏 미워하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부부의 헤어짐'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쪽의 죽음으로 비로소 결별을 맞이하는 부부의 풍경.
남겨진 한쪽은 어떤 모습, 어떤 마음일까.
죽음과 함께 미움도 죽음을 맞이할까.
먼지 수북한 과거의 필름을 영사기에 돌리던 나는 이제는 오지 않은 미래의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