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과속카메라가 있다면 아빠는 속도위반이었다.

#다섯 식구 연대기-5

by 모래의 여자

그 당시로 슈퍼는 장사가 꽤 잘되었더랬다. 지금처럼 대형마트나 편의점은 거의 없었고, 전국에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라 온라인 쇼핑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은 굉장히 흔한 카페나 아이스크림 전문점, 세계 과자 전문점 등과 같이 세분화된 상점들이 있던 것보단 '슈퍼마켓'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음료, 과자, 휴지, 아이스크림, 타월, 샴푸와 여러 생필품들 하다못해 콩나물이나 두부까지 있으니 무언가 필요한 이들의 발걸음은 당연히 슈퍼로 모이기 마련이었다.






엄마가 종종 하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그때 당시 하루에 못 벌어도 40-50 만원 정도의 매상이었고, 명절이나 연말 즈음이 되면 100만 원 정도는 우습게 벌었다고 한다. 요즘의 자영업을 생각해봐도 작은 매출이 아닌데, 90년대 초반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절대 적은 액수는 아닌듯하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만원 한 장의 가치를 따져보면 벌이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엄마는 버는 족족 통장에 욱여넣었다고 했다. 십 원 한 장 백 원한장 아낌없이 꽉꽉 쑤셔 담은 통장은 몇 개가 되었다고, 당시 가게를 차리며 빌렸던 빚도 다 갚았겠다 이젠 슈퍼를 열심히 운영하며 삼 형제만 잘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듯싶다. 하지만 그 계획과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와서도 엄마는 '그것'만 안 했으면 서울에 아파트가 한 채 정도는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가끔 취기 섞인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도 매번 "아니, 아빠는 '그걸' 왜 한 거야?" 라며 따져 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아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왜 무지개 슈퍼를 접었는지 엄마와 우리 삼 형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의 아빠도 그때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지개 슈퍼는 폐업되었다. 누군가나 어떤 상황에 당한 것이 아닌 부모님의 결정으로 스스로 되었고, 그때 아빠가 꽂혀있던 것은 '농심'이었다.






농심(農心). 1960년대 롯데 공업으로 시작하여 1979년에 '농민의 마음을 담았다.'라는 뜻의 농심으로 이름을 바꾼, 현재 한국 라면 점유율 1위의 업체인 이 회사에 아빠의 모든 것이 가 있었다. 신경과 관심, 마음, 몸 그리고 돈까지.


가게에 늘 붙었진 않았지만 종종 사람들이 집어가는 라면이며 과자를 보면 대부분 농심의 것이었다. 포테이토칩, 새우깡, 양파링, 오징어집과 신라면, 너구리, 육개장 등 대부분의 제품들이 인기가 좋다 보니 이것을 납품받아 팔기보단 반대로 우리가 여러 슈퍼에 납품을 해주면 지금보다 더 큰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때마침 무지개 슈퍼에 종종 들리던 농심 측 영업사원과도 이야기가 잘 돼가고 있으니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한 아빠는 웬일인지 엄마의 만류에도 속도를 밀어붙였다.






인생에도 과속카메라가 있다면, 정말 있다면 이때 아빠의 속도는 속도위반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이사도 빨랐고 매장을 얻는 것도 빨랐다. 게다가 영업사원과는 찰떡궁합이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한 것들이 원하는 대로 풀리다 보니 아빠는 '성공'이라는 것이 본인이 뻗은 손의 근처에 있던 거라고 생각한 듯싶다.


여기서 내 성격을 조금 이야기하자면 '세상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할 때, 자신의 계획이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면 반드시 이때를 늘 경계한다.'


누구도 몰랐다. 문장의 뜻에 정확하게 몰랐다. 아빠가 끈질기게 조르고 졸라 시작하게 된 '이것'이 우리 다섯 식구 고생길의 대문을 활짝 열어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