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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Apr 16. 2020

엑설런트

#에세이 15

최근에 수술받은 오른쪽 무릎이 부어 병원에 다녀왔다. 운동하거나 일을 할 때 무리하면 물이 차올라 땡땡하게 붓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도 비슷했다. 가장 좋은 것은 수술을 해준 병원의 의사에게 가는 것이지만 내가 수술받은 곳은 대학병원이라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으면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 며칠 동안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닐 것은 생각하면 고개를 가로젓곤, 집 근처의 관절 전문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꽤 규모가 있었다. 전체 8층의 규모였고 나름 준수한 의료진들로 인천에서는 관절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1층 병원 로비의 천장에 걸려있는 홍보 텔레비전에는 방송에 출연한 병원장이 웃고 있었다.


진료 표를 뽑은 뒤, 대기실에 잠시 앉아있었다. 유명세에 맞게 사람도 많았고 의사, 간호사들도 분주했다. 종종 사이렌 소리도 들렸는데, 뒷문의 엘리베이터로 바로 올라가는 듯했다. 대기실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웃는 사람, 우는 사람, 넋이 나간 사람, 무표정의 사람 등 모든 표정이 한 곳에 모여있으니 기괴했다. 그 표정들 속에서 내 표정은 어떤 것일지 떠올려보았다. 아마 예전, 무릎을 다쳤던 것을 후회하는 표정이라 생각했다.


대학교를 복학한 지 별로 안돼서 학교 체육 대회가 있었다. 독특하게도 성비 3:7의 학과로 여성이 더 많아 축구엔 대부분의 남성들이 차출되었는데 그중 나도 있었다. 그날 내 무릎의 사연에 대해 더 쓰긴 힘들지만 하여튼 그날 십자인대가 끊어졌는데, 왜 어른들이 취기를 통해 스스로를 하소연하는지 요즘 알 것 같다. 나도 술기운을 빌려 이 무릎만 아니었으면 떠들어댄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 간호사는 2층에서 영상실에 올라가 엑스레이를 찍고 내려오라고 하였고, 나는 '진작에 말해주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엉덩이를 들었다. 계단으로 올라간 그곳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간단하게 촬영을 하곤 내려와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에게 물었다.


"운동 좋아하시죠?"


난 떨떠름하게 답했다.


"네."


의사는 말을 이었다.


"딱 보니까 좋아하시게 생겼네요."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어디에 '나 운동 좋아합니다.'라고 쓰여있나 싶었는데, 갑자기 의사가 말했다.


"수술 몇 년 전에 받으신 거예요?"


"10년 전에요"


대학교 축구장에서 멧돼지 비슷한 놈에게 부딪힌 지 벌써 10년이 흘러다는 게 내 입으로 뱉고 보니 꽤나 놀라웠다. 의사가 짧게 탄식하며 다시 말했다.

"대단하네요. 수술도 수술인데 관리를 엄청 잘하신 거 같아요. 원래 수술하고 10년쯤엔 퇴행성 관절염이 오거든요.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없고... 정말 '엑설런트'내요."


가진 게 몸 덩어리밖에 없는 나에겐 천금 같은 소리였고 한결 마음이 놓였다. 마치 고장이 의심되는 전자기기를 수리센터에 맡겼더니, 망가진 곳은 없다며 오해하신 것이라는 엔지니어의 확답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 노동도 운동도 더 매진하길 다짐했다. 그 뒤, 난 의사에게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었다.


"사실은요, 여기가 수술을 7번 받은 무릎이거든요. 다행이네요"


의사의 기가 찬 듯 놀라 까무러치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쨌든 무릎에 찬 물은 알아서 마를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지금처럼 체중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면 따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말 그대로 무릎의 물은 알아서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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