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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의 여자 Apr 22. 2020

좋아하는 것

#에세이 17

나에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요즘 세상은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을 묻는 게 빠르기 때문일듯하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삶이 반복된다. 어렸을 적엔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며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경계는 애매해졌다.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자신의 경험과 성향, 지식에 맞춰진 좋은 것과 싫은 것들을 번복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들이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삶 속에서도 좋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존재한다. 나에게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며 배수진을 치고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운동이다.


운동만큼은 놓을 수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일들 앞에서도, 우정의 증표는 곧 술자리인 듯 착각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꽉 붙잡고 있었다. 시작은 중학교 2학년쯤이었다. 그때의 나는 무말랭이처럼 깡말라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엉덩이는 유독 커서 별명은 엉대호였는데,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는 본명이 낯설다. 여하튼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1.5L쯤의 빈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 아령으로 사용했었는데, 그때엔 그것이 꽤나 무거웠다. 낑낑거리는 모습이 부끄러워서 가족들에게 씻는다고 말하곤 샤워기를 틀어놓고 페트병을 치켜들었다. 작은 화장실이 나에겐 첫 헬스클럽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나의 형제들은 급한 배를 부여잡고 문 앞에서 총총거렸다. 엄마는 왜 그렇게 씻는 걸 좋아하냐며 다그쳤는데, 아빠는 별 말이 없었다.






당시로 S본부에서 방송하는 야인시대가 유행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친구들 사이에선 김두한의 활약이나 구마적의 덩치가 입에 오르내렸고, 그들처럼 몸 키우는 것 또한 유행이었다.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았더랬다. 잠을 많이 자면 근육으로 갈 영양소들이 키로 간다거나, 근육은 단백질이란 것을 먹고 크는데 번데기에 많아 외국인들도 그것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등 확인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처럼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친구 중 말을 잘하는 김승현의 의견이 가장 논리적이었는데, 그는 똥똥했더랬다. 나름대로의 논리와 체계적인 운동으로 키웠다며 화장실의 거울을 무대 삼아 깡 마른 팔에 뽈록 튀어나온 이두박근을 보곤 흡족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추억에 잠겨 헛웃음이 나온다.


벌써 18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운동에 대한 감정은 더욱 깊어져서 이제는 내 인생을 지지하는 중요한 근육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왜 이것에 매혹당했을까 생각해보다가 '정직'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많이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상엔 거짓과 모순이 판치고 있고 때론 그것을 숭배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류의 상황에선 '도끼를 믿는 게 모자란 놈이지' 라며 혀를 차는 정도이다. 하지만 운동이란 것은 꾸준하면 근육이 나오고, 매달리면 버텨진다. 안 먹으면 빠지고, 가벼운 몸으로 달리면 빨라진다. 이러니 세상에 운동만큼 정직한 게 또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심취해서  달려온 길이 근력운동과 유도, 마라톤을 지나 지금은 크로스핏에 도착했다. 다음의 목적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근면과 성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것은 내 인생관으로도 이어졌는데, 내 세상에서만큼은 쉽게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상상 속의 이야기였다. 늘 땀 흘려 일했고 내 것이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았다. 우연한 결과로 생기는 기회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정이 상식적이지 않다면 숟가락을 올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꾸준하게 하면 취미 이상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으로 내 밥그릇에 하얀 김이 모락 올라오는 쌀밥을 담는 것은 꿈도 꾸지 않지만 그저 어떤 의미로서 각인되었으면 한다. 먹고사는 일 말고 다른 것에도 미쳐봤었구나 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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