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2
선선한 바람이 불던 2010년의 9월 말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눈치챘다. 그것이 내가 느낀 불안의 시작이었다.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 앉을 곳이 없었다. 땀은 때 늦은 장마같이 쏟아졌고 오른 다리는 바로 서지 못했다. 허벅지와 종아리의 가운데를 연결해 주는 '그것' 이 없어 무릎은 제멋대로 앞과 뒤로 꺾였다. 끊어진 것은 오른쪽 십자인대였고, 진단은 완전 파열이었다. 물과 피가 섞여 차오르는 무릎은 터질 듯 부풀었다. 처음 방문했던 동네의 정형외과에서는 십자인대 재건술을 제안했다. 죽은 사람의 인대를 살아있는 내 몸에 넣어 붙이는 수술이었는데, 인대의 대부분은 해외에서 수입된다고 했다. 비용은 비싸지만 운동 꽤나 했던 사람들에겐 흔한 것이고 어쩌면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수술은 진료 당일 진행되었다. 난 수술실의 가운데에 위치한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내 주변의 의료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은색의 의료용 카트는 달그락 거렸고, 의료 기기들이 날 둘러쌌다. 간호사는 나에게 하반신 마취를 해야 하니 옆으로 누워 태아의 모양처럼 최대한 동그랗게 몸을 말아달라 주문했다. 그리고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보이지 않는 주삿바늘은 엉덩이 골 바로 위쪽으로 꽂혀 들어왔다. 뒤에서 꽂혀 주입되는 액체는 날카롭고 차가웠다. 서서히 하반신의 감각이 무뎌져 갔다. 의사는 엄지를 꼬집으며 아프냐 물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 허리춤에 걸쳐진 푸른 장막 뒤에서 진행되는 수술은 바빠 보였다.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수술 시간은 짧았고 곧바로 6인실로 옮겨졌다. 반찬의 간이 유독 싱거웠던 병원에서는 2주 동안 소독을 해주었다. 별다른 이상증세는 없다고 했다. 의사는 역시 젊은 게 좋다며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퇴원 뒤 다음 날, 다시 입원했다. 양쪽으로 벌어진 무릎의 수술 자국은 연분홍색의 립스틱처럼 붉어졌고, 그 틈에서 하얀 고름은 쏟고 쳤다. 빨간색과 하얀색은 섞이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웃음에는 깊은 난감함이 나타났다. 첫 번째 수술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수술도 당일 진행되었다. 의사의 설명은 이랬다. 젊은 남성의 몸이라 열이 많아 염증이 생겼는데, 그것이 수술부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끝으로 별일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의 젊음이 내 스스로를 공격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검색해본 수술 후기들 중에도 염증으로 고생했다는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병원밥을 먹은 지 4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쯤 염증을 긁어내는 3번째 수술을 받았다. 이제는 별 다른 설명 없이도 태아의 모습처럼 알아서 몸을 말았다. 굵은 팔뚝엔 매주 염증 수치 확인을 위한 주사자국들이 늘어갔다. 화장실의 거울을 보며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누런 이를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때까지는 괜찮았고, 의사도 염증 수치가 점점 줄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 날, 내 피에 염증이 섞여 온 몸을 돌고 있다고 했다. 패혈증이었다. 의사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스승이 있는 인천의 대학병원으로 옮겨달라 빌었다. 대학병원에서 입원 수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학병원으로 옮긴 당일 날, 병실로 동네 병원의 스승이라는 김 교수가 방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년이 조금 넘은 듯한 그는 백발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넋이 나간 나에게 김 교수는 본인을 믿으라고 했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며 내 부모, 형제들을 안심시켰다. 이 곳에서도 수술은 당일 진행되었다. 염증의 근원지였던 내 오른쪽 무릎의 안쪽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동네 병원과는 차이가 다른 넓고 깨끗한 수술실에서 의료진, 의료장비들이 누워있는 내 주변을 감쌌다. 정신없던 하루에도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기억은 수술 직전 김 교수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이 상태로 여기까지 온건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실신했다. 그렇게 4번째 수술을 끝내고 깨어보니 병실이었다.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고, 나 혼자 있어 불은 꺼져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무릎은 붕대로 감겨있었다. 욕지기가 올랐다. 차라리 이렇게 아무도 없을 때 혀를 깨물거나, 몸을 질질 끌고 나가떨어져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어떤 복서의 삶을 그린 영화처럼 누군가 다가와 죽음의 약물을 건네길 바랬다. 매일 죽을 생각만 했다. 망치로 머리를 으깨서 죽으면 아플까, 어떻게든 식칼을 구해서 가슴팍에 쑤셔 박으면 절명할까, 새벽녘의 인적 없는 화장실에서 목을 메달아 죽으면 병원은 우리 가족에게 피해보상 요구할까 등 넋이 나간 표정과는 반대로 내 머릿속에는 죽음이 불타고 있었다. 죽음은 검은 연기가 치솟는 산불처럼 맹렬하게 번져있었다. 그 불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죽는 것 밖에 없었다.
눈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침에 간이 안된 밥을 먹을 때, 물을 마실 때, 침대 위에 누워 똥오줌을 지릴 때, 회진하는 김 교수를 만났을 때, 소독을 할 때, 점심쯤 누군가 나를 찾아왔을 때, 넋 놓고 천장만 바라볼 때, 늦은 밤 혈압을 측정할 때 눈물은 스스로 나왔다. 눈두덩이 주변은 눌 부어있었고 혀가 잘려버린 듯 닫혀있는 입술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수술 결과는 참혹했다. 외국에서 수입했다던 인대는 염증에 다 녹아 없었다. 동네 의사는 빈 무릎을 가지고 치료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미친놈이라며 제자를 욕했고 이를 갈았다. 내 부모는 병원 한 복판의 찬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큰 울음의 모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미 눈물이 말라있던 나는 그저 지켜봤다.
대학병원에서는 퇴원한 뒤, 날을 잡아 재입원하길 바랬다. 십자인대 재건술을 다시 진행하기 위해선 지금의 몸상태로는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간 세상에는 빨갛던 낙엽은 없어지고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처음 입원했던 2010년에 느꼈던 가을의 선선함은 없었고 2011년의 겨울 추위는 낯설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가족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 안은 익숙했고 따뜻했다. 완벽한 사막처럼 말라있던 눈에서 눈물은 왈칵 쏟아졌는데, 병원에서 흘리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침묵하고 있던 온 가족은 거실 한복판에서 목놓아 울었다.
퇴원 전, 내 초점 없는 눈을 마주친 김 교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며 손을 잡았다. 책임지고 두발로 걸어 나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조건을 몇 가지 걸었다. 나가서 잘 먹고 푹 쉬고 돌아와야 할 것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오른쪽 다리에 착용한 보조기구를 이용하여 조금씩 걸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돌아가야 할 세상을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눈이 많이 쌓인 겨울은 걷기 좋았다. 뽀드득 소리는 귓속으로 울렸고, 마른 눈의 퍼석함은 발을 통해 몸으로 퍼졌다. 온 도보와 도로에 넓게 퍼진 하얀 눈에 비친 햇살은 하얗게 빛났다. 그중 나는 입김이 가장 좋았다. 내 깊은 속에서 생명을 품고 나오는 하얗고 더운 김을 보았을 때, 난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 5번째 수술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