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대, 괜찮아

산이 나에게 말했다, 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산책이나 하자 싶었다. 어제의 경험을 떠올리며, 늦게 밖을 나가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 밖의 공기를 마시면 힘이 날 테니 나갔다가 들어와서 청소도 하고 점심도 먹으며 활기를 되찾자 다짐했다.

밖엔 날이 너무 춥지 않았지만 흐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람만 덜 불면 걷기엔 크게 불편함이 없으니까. 도서관에 들러 빌린 책을 반납하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들어가자마자 풍경을 쳐다볼 틈 없이 기분을 전환하겠다며 무작정 걸었다. 그때,     

그때 이 작은 공원을 커다란 산이 품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날이 흐려서, 그리고 산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가득해서 산이 공원을 품는 건 아름답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이 산의 깊이를 대신 말해주었기에 평소보다 더 웅장해 보였다. 이호철의 <큰 산>이란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봤던 ‘큰 산’이 보이지 않자 느꼈던 불안감을 떠올리며 오늘날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은 다 ‘큰 산’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산을 보고 자라지 않은 나는 세상의 광활함을 알지 못한다. 빌딩으로 시야가 가로막혀 매일 코앞만 보고 사니 코앞에 작은 일이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여긴다. 코앞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갑자기 벌어지는 일들은 세상 밖 이야기인 듯 깜짝 놀란다. 이건 다 산을 보지 않아서다.      

산을 바라보니, 그 넓은 산을 바라보니, 나라는 존재가 작게 느껴졌다. 산이 작은 존재인 나를 품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넓게 넓게 끝도 없이 펼쳐진 산. 그것이 세상의 크기였고, 그것이 자연이었고, 그것이 신이었다. 초록색으로 가득한 산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눈으로 뒤덮인 나목들로 가득한 산도 있다. 자연은 변하는 것이다. 인간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현재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건 넓은 산과 어울리지 않다. 광활한 대지와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 서울 야경을 바라보면 빠지지 않고 들던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상에 비해 나라는 사람이 너무 작아 보여서,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서울 야경이 아름다운 줄 몰랐다. 그저 한숨이 나왔고 허무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작은 존재인 내가 집착하는 목숨이라는 것, 그것도 결국엔 너무도 작은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광활한 산을 바라보고만 있으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산을 바라보고 나니 힘이 났다.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고 싶은 게 생각이 나서 마트에 들러 떡국용 떡을 사서 떡국을 끓였다. 오랜만에 마음에 잡티가 사라지고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의 최종 목표는 나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해야 할 숙제다.     

종종 산을 바라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