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계절은 궁궐에서 시작된다.
여름과 겨울 사이에 마지못해 끼어있는 듯한 가을은 해를 거듭할수록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 당연하듯 오더라도 그 짧은 순간을 즐겨야 하는 우리의 마음은 늘 초조하다. 그런 초조함에 위안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서울의 궁궐은 가장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다. 무려 다섯 가지의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궁궐의 도시에 살고 있다니. 서울에 사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겠지.
매 계절마다 궁궐에 가는 것은 이제 루틴이 되어버렸다. 꽃이 만개할 때, 푸르른 녹음이 짙어질 때, 노랗고 붉은 잎들이 넘실거릴 때, 그리고 함박눈이 내릴 때. 최소 4번은 꼭 가줘야 한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면 ‘너 궁궐 갔다 왔어? 언제 가?’라고 물을 정도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지금이 절정인지, 언제 가면 좋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느 궁궐로 가는 게 가장 좋냐고 말이다.
가을은 경복궁이다. 경복궁의 가을은 담 밖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노오란 은행나무에서 시작된다. 담 밖에서 시작된 가을은 경복궁의 담을 넘어 궁궐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민다. 이 장관에 울긋불긋, 물들락 말락 하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경복궁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다. 산까지 풍경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경복궁은 담 안팎으로 가장 완벽한 서울의 가을을 선사한다. 이러니 경복궁의 가을을 모두에게 고집할 수밖에 없다.
평소 같으면 전각에 초점을 맞춰 경복궁의 수직축인 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따라 북쪽을 향해 걷겠지만, 가을이니까 과감히 다른 코스를 택한다. 정면에 근정전을 두고 과감히 왼쪽으로 틀면 경회루로 이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정겨운 버드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잠시 앉아 경회루를 감상하다 가자. 경회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몇 개인지 세어보기도 하면서. 여기서부터는 경회루를 따라 크게 돌게 되는데 터만 남은 혼전(魂殿) 영역을 지나게 된다. 이 영역은 계획대로 진행만 된다면 2031년부터 복원될 예정이다. 늘 터만 남아 허전한가 싶다가도 가을에는 그 비어버린 터마저 가을의 한 부분으로 녹아든다.
그렇게 북악산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향원정에 다다르게 된다. 강고한 경회루와 대조를 이루는 향원정은 아담하고 담백한 맛이 있는 누각이다. 이 누각을 향원지가 둘러싸고 있고, 그 향원지를 둘러싼 고목들은 하늘에 닿을 듯 위로 솟아 있으며 저마다의 노랗고 붉은 기운을 뽐내며 가을을 알리고 있다. 최근 향원정은 4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마침내 그 베일을 벗었다. 옛 모습으로 복원된 취향교가 눈에 띄는데, 배치된 방향과 다리 모양새가 새롭다. 향원정을 향해 남에서 북으로 뻗었던 취향교가 건청궁 앞에 위치하게 되면서 북에서 남으로 뻗게 되었고, 평평했던 나무다리가 은근한 곡선을 그린 흰 구름다리가 되었다는 점을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부조화에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곧 익숙해질 한 장면이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경복궁에서 음미하는 가을의 절정은 향원정, 경복궁의 북쪽 끝인 가장 안쪽에서 화사하게 피어난다. 담 밖을 따라 걷는 것으로 시작된 경복궁 가을 나들이는 향원정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이번 주까지 경복궁의 가을은 완연할 것 같습니다. 서울의 가을, 그리고 경복궁의 가을을 마음껏 즐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