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해소주, 서울에 사는 사람도 잘 모르는 서울의 술.
서울이란 도시 자체에 과몰입하던 시절, 서울의 럭셔리를 기대하고 오는 고상한 취향을 가진 게스트들을 위한 '경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여러 경험 중에서도 가장 중추적인 경험인 '맛의 경험'을 확장하기 위한 서울의 술을 찾아 헤맸다. 서울에 왔으니 서울의 근본 있는 술을 마시게 해주고 싶은 아주 간단한 논리에서 출발했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꽤 멋진 전통주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초록색 병에 담긴 우리의 정겨운 소주도 게스트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술이라 하기엔 어딘가 심심하고 밍밍하다는 후기가 많았다. 코리안들이 술을 잘 마시는 술톤의 민족이라 듣긴 들었지만, 고작 이런 술을 마시고 있었냐는 뉘앙스에 질 수 없었던 코리안 컨시어지는 술을 찾아 나설 수밖에! 당시 사람들에게 전통주란 막걸리 또는 동동주뿐이었고 좋은 날 기분 내기 위해 마시는 고급술로 화요가 전부였다. 그 비슷한 시기에 스파클링 막걸리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등장한 복순도가가 이제 막 메뉴판에 얼굴을 내밀었고 그때 운 좋게 마주하게 된 술이 삼해소주였다. 벌써 4년도 더 된 일이다.
찾았다, 해냈다는 기쁨에 삼해소주와 미팅 겸 답사 날짜를 빠르게 정했다. 종이 서류나 뒤적이는 미팅 겸 답사려니 했지만 술은 마셔봐야 안다며 떠먹는 술인 이화 백주부터 가볍게 시작하여 삼해소주의 종점인 삼해 귀주까지 명인님과 대표님 덕분에 숨차게 맛볼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누군가 권해주는 술을 절대 마시지 않던 나였는데 이 날은 달랐다. 날은 화창했고 술은 달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소주 맛을 완전히 뒤바꾸는 맛이었고 이건 진즉 마셔봤어야 하는 술이다.
삼해소주는 빚고 싶다고 해서 언제든 빚을 수 있는 술이 아니며, 마시고 싶다 해서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1년에 3번만 빚을 수 있는 술이다. 삼해(三亥)의 해(亥)는 돼지 해 자로 정월 돼지일을 시작으로 3번의 돼지일, 총 108일의 발효일을 거쳐 4번째 돼지일에 개봉하는 삼해주의 탁주를 증류한 술이 바로 삼해소주다. 이런 탄탄한 스토리의 시작은 컨시어지를 언제나 설레게 한다! 또한 삼해소주는 물을 섞지 않은 증류주로 도수가 꽤 높은 편이다. 그래도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순간 아찔해지지만 이내 깔끔하게 사그라들기에 다음 잔을 들이켤 준비가 바로 된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지 모를 삼해소주는 그 목 넘김 이후 찾아오는 부드러움 때문에 자꾸만 술이 당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삼해소주의 첫인상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지금에야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전통주를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시 투명하고 슬림한 유리병에 담겨 찰랑거리는 삼해소주가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포도, 귤, 버섯을 활용한 삼해소주의 변신도 인상 깊었다. 소주의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은은하고 깊게 또 다른 향과 풍미를 자랑한다. 한창 자몽에 이슬, 이슬 톡톡과 같은 달달한 소주 계열이 불티나게 출시되었고 지금의 민트 초코 소주까지, 온갖 맛을 첨가한 실험적인 소주가 요즘도 등장하고 있지만, 삼해소주는 이미 훨씬 전부터 새롭고 세련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통이란 그저 예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맥이 이어지고 이어질수록 전통의 세계는 자유자재로 확장될 수 있다.
지난 여름, 삼해소주의 김택상 명인님이 세상을 떠났다. 얼굴 뵀던 건 그날 딱 하루였는데, 워낙 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셨던 분이라 마음만은 언제나 가까웠다. 이제 명인님이 계시지 않기에 삼해소주를 공식적으로 빚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빚었을 삼해소주를 어렵게 몇 병 구했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은 나날이 커져간다. 살다 살다 술과의 이별을 하게 될 줄이야. 다행히도 내년 초까지는 맛볼 수 있는 삼해소주는 공급될 것이라 한다. 명인의 삼해소주는 더는 없지만, 삼해소주에 공백이 생기지 않게 많은 분들이 애써주고 계시기에 앞으로 더 기대되는 삼해소주다.
그리고 삼해소주가 초면이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명인의 마지막 삼해소주를 찾아 한 잔씩 꼭 들이켜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