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무언가와 이별하고 무언가를 맞이하는 계절 앞에서

by 엄달님

2025.11.18. 화 8:45


날짜를 쓰면서 새삼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벌써 2025년 11월 중순을 넘기고 있다니. 올해 난 무엇을 했더라. 훗날 내 꽃 같은 스물여덟을 게으르게 보낸 것에 후회하게 되려나. 아니 생각해 보면 그다지 게으르진 않았나. 올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뮤지컬 공연을 했다. 내 공연에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어제 친구의 청첩장 모임을 하며 들었던 생각은 내 공연에 와주신 모든 분들을 꼭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도장처럼 꾹꾹 찍어내는 양산형 결혼을 하고 싶지 않고, 그럴 바에야 안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극 공연도 하나 했다. '영혼의 물고기'를 연기해야 했던 뮤지컬도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많았는데, 나의 첫 연극도 그러했다. 나는 연기를 위한 연기를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차라리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 후련하기도 했다. 가족 뮤지컬도 하나 올렸는데, 역시 어려웠다.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곱씹다 보니 올해 했던 세 편의 공연 모두 과정에 있어 큰 어려움이 따랐다. 모든 공연을 준비하며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할까, 즐겁지 못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연기라는 것이, 무대에 선다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반드시 무언가를 넘어야 하고, 깨뜨려야 한다. 어떤 영상 하나를 봤다. 사람들은 '연기자'가 아니라 '스타'가 되고 싶어 한다고. 그런데 연기자가 되고 싶다면 과정은 반드시 고통스럽고, 연기는 어려운 거라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스타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연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지금 회피하고 있는 것인가? 고통의 과정을. 12월, 정식 공연은 아니지만 리딩공연 두 가지를 앞두고 있다. 왠지 마음속에 리딩공연은 쉽게 하니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조금 있다.


내년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보다는 훨씬 거칠게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산을 헤치리라 다짐한다. 지금의 나는 산봉우리가 무서워 둘레길로 빙빙 돌고 있는 가짜 순례자 같다. 오늘 아침 혼자만 출근하지 않고 프리랜서의 시간을 허탈하게 날리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이참에 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자. 엄마 아빠와 추억을 쌓자. 그렇다기에 우린 각자 공간에서 휴대폰을 하는 시간이 길고 할머니에겐 어제 버럭 또 화를 내버렸다. 왜 자꾸만 할머니에게 화를 내게 될까. 밉다. 아 물론 꽤 오랫동안 네 명이서 아침을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있다. 오늘은 할머니에게 소리치지 말아야지. 가족들과 더 많이 대화를 나눠야지.


부쩍 차가워진 공기 때문인지 나는 한 해를 정리하고만 싶다. 겨울은 떠나보내는 계절. 언제부턴가 겨울 앞에선 항상 무엇인가와 이별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은 그렇다면 밀린 다이어리를 쓰고 내가 미루느라 못 한 것들을 점검해야겠다. 어저께 친구와 어도비 프로그램 1년 치를 함께 구매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영상 프로그램이다. 당장 시작하진 않고 있지만, 프로그램을 함께 구독할 파트너를 찾는 친구에게 선뜻 '내가 하겠다'라고 나선 것은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꼭 2026년 1월 1일부터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난 올 연말부터 인생에서 정말 많이 미룬 것들을 하나씩 시작할까 한다. 오늘 많이 춥다고 아침에 J에게서 연락이 왔다. 겨울이다. 떠나보내는 한편, 어떤 것들은 맞이한다. 꽃을 피우기 전에 씨앗을 심고 추위를 견디라고 잘 감싸 줘야 하기 마련. 스스로에게 오늘은 그런 시간을 선물해야겠다.


더 쓰고 싶은데, 내가 아침에 꿈에서 헤매느라 모닝페이지 쓰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래서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시작했다. 다 같이 먹어야 하는데 내가 느릿느릿했다. 아빠는 잠깐 내 방에 왔다가 '이러다 해리포터 같은 거 하나 나오는 거 아냐?'라며 기대한다. 아빠 미안해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혹시 모르죠 있을지는. 그런데 저는 지금 그냥 아침 일기를 쓰고 있어요. 기대에 부응할 만한 일을 해야 하는데,라는 부담도 스친다. 아빠는 그냥 한 얘기겠지만 나는 지금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이라.


아무튼 이제 아침 먹을 시간이다.


겨울이다.


무언가 떠나보내고

무언가 심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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