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코리안 시리즈
추석을 맞아 돼지갈비를 사러 마트에 갔다. 계산하려고 줄을 서있는데 내 앞에 이동식 카트가 길을 막고 있었다. 계산대가 좁아 고기를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데 옆에 있던 직원이 카트를 치워주겠다고 했다. 그 직원은 카트를 밀고 나가기 위해 카드 결제기에서 싸인 중이던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
그 순간 그 아주머니는 얼굴을 구기며 소리 질렀다.
"그거 좀 이따가 하면 되지, 사람을 밀쳐가면서 지금 당장 해야 해요?!!!"
얼마나 큰 소리로 말했냐면 주변에 있는 모든 캐셔와 인포메이션 직원들, 줄 서있던 손님들까지 모든 행동을 멈추고 우리 쪽을 바라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카트를 밀던 직원은 놀란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화를 멈추지 않았다. 결제기에 싸인을 하고,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마트 정문을 나설 때까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직원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주머니의 고함을 듣고만 있었다.
"그게 뭐 중요한데 사람을 밀쳐가면서 하냐고요!!! 기다렸다가 하지!!! 그것도 못 기다려요!!!"
마트에 있는 직원 그 누구도 아주머니를 제지하지 못했다. 잠시 비켜달라는 말이 사람에 따라 기분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말을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카트를 정리하던 직원은 초면인 아주머니에게 큰 소리로 혼날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를 카트로 밀치지도 않았다. 뒤에서 엉거주춤 기다리던 나를 배려했을 뿐인데 공개적으로 욕만 먹었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끼어들걸 그랬나. 직원분은 나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라며 내가 아주머니에게 사과할걸 그랬다. 그랬다면 그 아주머니도 같은 손님인 나에게 소리 지르지 못했을 텐데.
상대가 직장 상사처럼 어려웠거나, 최소한 평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면 초면에 그럴 수 없다. 만약 그 아주머니도 상대가 시어머니였다면 그렇게까지 화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 그런 아량이 상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걸까. 왜 손님은 왕일까. 왜 다짜고짜 소리 지르며 화내는 손님에게 '그만 하시라'며 함께 목소리 높일 수 없는 걸까. 직원은 손님보다 낮은 계급이기 때문일까.
고등학생 때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진 인도에서 최하위 계급인 불가촉천민은 허리 뒤춤에 항상 빗자루를 묶고 다닌다. 발자국조차 불결하다고 믿은 탓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실제로 카스트 제도를 목격했다. 한 남자가 가만히 길가던 사람의 뺨을 갑자기 때리고 욕을 하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피해자는 무기력했다. 가만히 누워서 맞고만 있었다. 너무 놀랐는데 같은 상황을 두어 차례 목격하고 알았다. 이런 일은 인도에서 흔한 일이었다. 카스트 제도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언제나 나와 나이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해했다. 단순히 엄마와 사이가 나빠서 영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으면 윗사람 대접을 받으려 하는 모습이 불편했던 거였다. 이 불편함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깨달았다. 유학이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신 한국인 선생님을 보고 나이와 반말의 편견이 깨졌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교회에 갔는데 사람들은 내 이름 대신 나이를 물어봤다. 내 성도, 이름도, 하는 일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반말부터 했다.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으니까 말 편하게 할게. 괜찮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나이에 관계없이 맞존대하며 예의를 갖추는데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다. 특히 "여자 혼자 사냐?"라고 초면의 남자에게 들었을 때 기분이란.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뾰족한 해결 방법은 없었다. 그냥 적당히 무시하면서 참고 산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이가 다르면 쉽게 친해지기가 어렵다. 마음이 맞아도 나이에 따른 서열이 있고, 존댓말과 반말로 그 계급이 뚜렷하게 나뉘니 유리벽이 있는 기분이다. 같은 이유로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어렵다. 캐나다에 다녀온 이후로는 나 혼자 반말 쓰는 상황이 어색하다. 그렇다고 함께 존댓말을 하는 것도, 반말을 하는 것도 다 어색하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에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나이, 성별, 직급, 가족 관계.. 한국의 보이지 않는 계급 문화는 정말 필요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