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출판 계약서 메일로 다 확인하셨죠?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으시다면 댁으로 계약서를 보내드릴게요.
사인해서 출판사에 다시 보내주시면 됩니다."
사인만 하면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내 이름 석자가 찍힌 책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출판사는 규모가 크고 유명했다. 보통 투고 답장이 몇 주씩 걸리는데 반해 이곳은 내가 메일을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그만큼 내 글과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다.
"다른 데서도 연락 왔죠? 안 올리가 없는데. 원고 재밌어요."
담당자는 말했다. 세상에 무수한 사막 이야기가 있지만 낙타 똥 얘기하는 사막 여행기는 처음이었다고, 사막의 별이 아름다웠다는 얘기만 들어봤는데 내 글을 읽고 사막에서의 하룻밤이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음을 알았다고. 특히 옆에 누워있는 지태에게 방귀 뀌지 말라고 옆구리를 찌르는 장면에선 자기도 옆에 누워있는 듯했다며 웃었다. (바로가기 - 사막에서 당신과 하룻밤) 미팅을 하는 한 시간 동안 출판사의 자부심과 실력이 느껴졌다. 더 이상 좋은 곳을 만나기 힘들어 보였다. 특히 내 장점을 잘 짚어주는 눈썰미에 신뢰가 갔다.
"작가님은 같은 일을 경험해도 깨닫거나 보는 시야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시네요, 그리고 문장이 통통 튀니까 어울리는 그림체는 이게 좋겠어요."
출판사의 말에, 여기서 책을 내면 나도 많이 배울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으니, 출판사는 미팅 처음부터 계약서를 보내는 순간까지 한 가지를 강조했다.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많은 수정들을 모두 들어줄 수 있겠느냐?
막무가내로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작가님과 충분한 협의 후 진행할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출판사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만큼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면 내 의견을 내 세울 수 없겠지. 그게 출판사의 조건이었다.
나는 원래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엄마는 항상 나를 청개구리라고 불렀다. 그래도 이건 일이니까 본성을 꺾어보자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투고에 지치기도 했다. 내 글에 자신감이 떨어질 즈음 나에게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래서 그냥 계약하자고 했다. 그리고 출판사의 답장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나는 행복하거나 뿌듯한 대신 불안했다. 과연 내가 출판사의 모든 수정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까?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할 때마다 내 안에 어떤 확신이 서길 기다린다. 대학교 전공을 정할 때 그랬고,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다 포기할 때, 귀국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동네를 정할 때 그랬다.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 확신이 없었다.
출판사에 투고를 하기 전에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의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다. 상대는 사랑하긴커녕 친구보다도 사이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혼인신고'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계약을 위한 계약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유부녀였다. 더 이상의 혼인신고는 불가능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놓칠 판이었다. 그때, 나와 혼인신고한 남자가 내 옆을 지나갔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쌩판 모르는 남처럼..
혹시 혼인신고가 출판 계약인 걸까? 그렇다면 계약을 위한 계약은 하면 안 되겠다. (모든 꿈을 믿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꿈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또 다른 출판사에서 계약이 진행되었냐는 메일이 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글의 가치가 달라진다.
어떤 출판사에서 내 글은 고칠게 투성인 글이라고 했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내 글은 고칠게 거의 없는 완벽한 글이라고 했다. 담당자에 따라 내 글의 가치가, 작가의 문체가, 원석 그대로의 느낌이 보존될지 깎여나갈지 결정된다. 나는 정말 출판사의 모든 수정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까? 대답은 No, 전혀 자신이 없다. 지금 멈추는 게 맞다. 이혼보다 파혼이 나으니까.
출판사에 거절 메일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출판사에서도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계약을 위한 계약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맞는 출판사를 기다려야 한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놓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