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잘한 일
솔직히 이 안경케이스를 열기 전에는 이 안에 당연히 잘 안 쓰는 선글라스 같은 게 들어있을 줄 알았다.
그 시절 내가 쓰던 안경이 들어있을 줄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라섹수술 한 지가 벌써 5년이 넘었으니까••
어릴 땐 안경이 쓰고 싶었다. 언니가 안경을 썼으니까.
열심히 책도 보고 티비도 보고 컴퓨터도 한 결과로 안경을 쓰게 됐을 때. 엄마아빠는 한숨을 쉬셨지만 난 속으로 기뻐했었다.
왠지 멋진 것 같잖아. 안경이라니.
하지만 햇수를 거듭하며 시력은 -6.6 까지 떨어졌고, 사춘기 소녀는 안경이 창피해졌다. 놀러 가거나 사진을 찍을 땐 렌즈를 꼈다. 소프트렌즈 컬러렌즈 등을 몇 년 끼다가 소프트렌즈 특유의 눈알을 꽉 잡는 느낌이 싫어서 고등학생 때부터는 하드렌즈에 정착했다. 가뿐한 느낌이 좋았다. 모래바람이나 먼지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죽음이었지만.
대학생활 내내 하드렌즈와 안경을 병행하고, 하드렌즈가 깨질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사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임용고시생 신분일 때는 안경을 썼다. 나는 한 번 편안함을 느낀 것에는 유행과 트렌드에 굴하지 않고 정착하는 특성이 있는데, 위의 안경도 그랬다. 지금 보면 너무 촌스러운 갈색-얼룩무늬 안경테가 뭐가 그렇게 맘에 들었는지, 학생 때부터 안경테 바꿀 때마다 저런 안경테로만 골랐다.
2018년, 첫 학교로 발령받고 첫여름 방학 때 드디어 라섹수술을 했다. 친한 친구 중 엄청난 영업왕이 있는데 그녀가 신촌 수연세안과의 고일환선생님을 영업했다. 라섹수술 업계의 최고 권위자라는 말에 신뢰가 갔다. 온갖 부작용 사례를 찾아보며 최악의 경우 두 눈을 포기하고 살자는 다짐까지 했을 때, 진료예약을 했다. 몇 달을 대기한 후 검사 및 진료를 받았고, 여름방학에 맞춰 수술했다.
살면서 수술이란 걸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수술대에 누워서는 너무 떨려서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둘 곳 없는 손으로 브래지어 밑부분을 동아줄 잡듯 잡고 있던 기억도 난다.
며칠이나 유튜브로 연습했듯이, 수술대에 누워 초록색 빨간색 점만 죽일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칼 같은 것이 내 동공 위에 동그라미를 그릴 때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그건 왜 유튜브에 안 나오나요.
오징어 타는 냄새가 조금 나더니 오른쪽 수술이 끝났다고 하셨다. 왼쪽 눈으로 기기들을 옮기는 사이, 오른쪽 눈을 가리기 전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에. 기계에 써진 글자들이 ’ 읽혔다 ‘. 그때 ’와 씨 나 눈 좋아졌다.‘ 하며 흥분감이 차올랐다.
아빠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슬슬 마취가 풀리며 고통이 찾아왔다. 아주 자잘하고 날카로운 손톱조각들이 눈 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2018년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온 해였는데, 나는 라섹수술 환자의 신분으로 에어컨이 있는 엄마방(안방)에 감금된 채 시원하게 고통을 즐길 수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하루종일 라디오만 들으며, 벽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그동안의 죄를 이 고통으로 주시는 건가요.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이 고통을 제발 끝내주세요.’ 하고 매일 기도했다.
고통의 일주일을 보낸 뒤 슬슬 눈 뜨기가 가뿐해졌을 때부터, 나는 내가 태어나 스스로 선택한 일 중 이 일이 가장 잘 한 일임을 깨달았다. 잠에서 깨어나 손으로 더듬더듬 안경을 찾아 쓰지 않아도 바로 벽에 있는 시계를 볼 수 있다. 안경이 얼굴을 짓누르고 콧대를 짓누르지 않아도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할 수 있다. 아침마다 하드렌즈를 닦아 눈에 끼거나 밤마다 하드렌즈를 뾱뾱이로 빼서 닦아 렌즈통에 넣어놓지 않아도 된다. 안경도 렌즈도 없이 온전한 내 두 눈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영업력이 부족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라섹수술을 적극적으로 권하진 못했지만,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수술도 잘 됐고 수술 후 회복도 잘했기 때문에(정말 일주일 동안 핸드폰과 TV 전혀 안 보고 라디오만 들었다.) 여전히 부작용 없이 양눈 1.5 이상의 시력을 유지하고 있다.
5년 만에 안경을 버리며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을 다시 회상해 본다. 그때의 무거운 결심, 짜릿함, 고통, 환희.
블루라이트 차단 보안경을 다시 열심히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