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강아지

by 재인


나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동물이지만 어쨌든 한 생명의 삶이 온전히 내게 온다는 건 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나의 반려견은 몰티즈 믹스 아홉 살이다. 아홉 살이면 사람 나이로 60대 이상이려나.

하지만 강아지는 여전히 자신이 어린 강아지라고 생각하는지 뭔가를 깔아줘도 꼭 안기려고 한다.

그렇게 안고 있으면 자세가 경직되어서 불편하지만 강아지의 눈을 보면 안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은 믹스견을 두 마리 키우셨는데 몇 년 전에

둘 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둘째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하필(!) 나는 부모님 집에 있었고 작은 강아지가 죽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는 죽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끙끙거리면서 부단히 애썼다. 생명이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이든 사느라 애쓰는 건 마찬가지인데 생이 끝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죽기 위해서도 사는 것처럼 애써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고 잊히지도 않는다. 작은 생명도 죽기까지 그토록 애쓰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그날 부모님은 엄청 많이 우셨고 나도 많이 울었다. 나는 부모님 집에 갈 때 몇 번 본 게 다 인데도 그랬다.




이제 개 식용이 불법이다. 유예 기간이 있지만 결국 불법이 되었다. 사실 난 불법이 되기 전에 개 식용에 찬성도 반대도 아니었다. 찬성하자니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반대하자니 나는 육식을 한다.

소, 돼지, 닭, 양 등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은 사람에게 '먹힐 의무'가 있는데 개는 아닌가, 에 대한 뚜렷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먹힐 의무' 혹은 '먹혀도 되는' 동물이 따로 있고 아닌 동물이 따로 있을까. 물론 식용으로 공장식 사육이 되는 동물들은 식용개 농장들에 비해 관리가 된다. 그리고 도살을 할 때에도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다. 동물들이 사람처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해도 죽음 자체를 두려워 하긴 할 것이다. 사실 도살 방식의 잔인성도 문제지만 '먹히기 위해' 도살된다는 것 자체가 잔인하다.

나는 육식을 하지만, 그래서 육식을 할 때 죄책감이 든다. 이게 맞을까. 사실 식물을 먹어도 그런 죄책감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농작물도 농작물만 자라는 게 아닌 수많은 생명들의 관여에서 자라니까.




사람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구상 생명들은 다른 생명의 덕으로 살아간다. 특히 사람은 '먹히기 위해' 키워지는 동물의 살과 피로, 해와 비와 공기를 머금은 수많은 식물들의 작용으로, 그리고 그 생명들의 목숨을 키우고 거둬야 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애씀으로 살아간다.


죄책감, 한 생명이 온전히, 내게 온다는 건

꽤 부담스럽고 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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