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 영화 <숨바꼭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라하를 여행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무릎을 꿇고 얼굴도 들지 않고 구걸하는 노숙자와 개수대에서 물을 잔뜩 받아 대형 비누방울을 만드는 노숙자들을 보며, 여기 노숙자는 비누방울을 만드네-라고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면, 파리의 노숙자만큼 참 특이한 노숙자들도 없다. 정해진 집이 없는 사람들(Sans Domicile Fixe)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노숙자는, 어느 나라에서처럼 지하철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비를 피할 수 있는 다리 밑에서도, 슈퍼마켓 앞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좀체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다. 오히려 지하철에서는 당신들은 따뜻한 집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나는 그렇지 않다,며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먹을 수 있는 티켓이나 동전을 달라고 아주 당당하게 요구한다. 꼭 맡겨놓은 사람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루는 지하철 안에서 만난 노숙자에게 한 여자가 레스토랑 티켓을 줬는데,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한 장 만 더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고, 그렇게 15유로 상당의 티켓 두 장을 받아갔다.
집 앞, 자주 가는 카페* 앞에 자리를 잡은 노숙자도 있는데, 그는 루마니아에서 와서 어느덧 아이까지 낳았다고 한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에게 몇 상팀의 동전을 요구하기도 하고, 바로 옆 담뱃가게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기도 한다(알다시피 유럽의 담배는 비싸다). 자신의 카페 앞에 담요 하나를 덮고 앉아있는 노숙자를 주인은 쫓아내지 않고, 가끔 그가 오픈 시간 테이블 설치를 도와주면 커피를 한 잔 내려준다. 하루는, 카페에 앉아있다 다섯살 남짓한 여자애와 엄마가 그 노숙자 앞을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엄마는 노숙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는 인사와 함께 그 아이의 손과 뺨을 만지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또 한 친구는, 다른 친구집에 놀러갔다 아파트 복도에 자리잡은 노숙자에게, 여기서 뭐하시냐고 했다가, “여기가 니꺼냐”는 반문에 고작, “아, 여기도 제 집이 아니"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의, 아이의 손을 만지기는 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했을 부모들, 아파트 복도의 수상한 사람을 경비원에게 신고해 쫓아낼 사람들이 떠올랐다.
파리에서는, 그들도 역시 지역사회의 일원이요, 사람들의 도움을 아주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난민 수용과 이민자의 역사가 그만큼 길기 때문일까. 레오 까락스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나 피오나 고든&도미니크 아벨의 <로스트인파리>에서는 다리 밑에 사는 노숙자들의 삶과 사랑도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반면, 한국의 노숙자들은 제대로 된 집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하는 존재(영화 <숨바꼭질>)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해악을 가장 먼저, 적나라하게 입게 되는 존재(영화 <서울역>)로 그려진다.
파리의 거리에서 심심찮게 맡게 되는 오줌 냄새와 노숙자들의 오줌주머니 같은 것을 보노라면 분명 혐오스러움을 감출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자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시사하는 점이 있다.
* ‘그의 단골바에 앉아서’에 나왔던 그 카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