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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예방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른 이들을 위한 자살예방이 아닌 진정 나를 위한 자살예방을 위하여

by 에피

오늘날 자살 예방은 당연한 선(善)으로 여겨진다. 정부와 사회는 생명을 지키라고 호소하고, 주변 사람들은 ’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삶의 명령은 과연 당사자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사회 전체의 명분이나 통제 장치일 뿐일까. 자살을 시도하는 개인에게 “죽지 말라”는 요청은 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한 결과인지, 아니면 “생명은 소중하다”는 추상적 대의를 강요하는 것인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칸트의 입장에서 자살은 도덕적 의무의 정면 위반이다. 칸트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 인격 속에 있는 도덕성의 주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끊음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도덕적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기에, 이는 자기 자신을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행위가 된다. 칸트에 따르면 자기 자신마저 인간성의 존엄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고통을 피하기 위한 자살은 이성에 대한 모순적 행위이며 보편적 도덕법칙으로 승인될 수 없다. 한마디로, 고통이 크다는 이유로 생명을 끊는 것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밀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행동은 간섭받아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동시에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예컨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아 모든 미래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는 인정되지 않아야 하듯, 자살 역시 자유의 전제인 삶 자체를 없애는 행위이기에 사회가 말릴 근거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밀의 논지를 확장하면, 자살하려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미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개입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삶을 끝낼 권리도 개인의 것이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개입을 부당한 자유 침해로 느낄 수 있다. 밀의 관점은 이렇게 개인의 자기 결정권과 사회적 보호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한편, 공리주의 시각에서 보면 더 극단적인 해석도 나오는데, 인생에 남은 고통이 쾌락보다 많다면 삶을 조기에 끝내는 것이 오히려 전체 행복의 총량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저울질해 고통이 압도적이면 자살도 합리적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논지는 칸트의 절대 엄금과는 대조적으로, 자살을 하나의 이익-손해 분석 문제로 간주한다.

알베르 카뮈는 자살 문제를 보다 실존적 차원에서 사유했다.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삶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철학의 근본 문제로 삼았다. 우리 삶이 부조리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과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데, 카뮈는 이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반항’을 답으로 내놓는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인간성과 의미에 대한 부조리의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카뮈는 자살을 거부한다. 대신 의식적인 반항을 통해 부조리와 싸우며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역설한다. 그는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라고 썼다. 요컨대 카뮈에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에 대한 순진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는 인간의 존엄 때문이다.


종교와 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생명의 절대적 성스러움이 강조된다. 거의 모든 주요 종교가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해 왔으며, 기독교의 경우 자살한 이는 회개할 기회를 잃었기에 구원이 어렵다는 교리가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유일신 신앙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신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는 창조주의 권한을 침해하는 반역으로 간주된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자살자는 살인자와 같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을 자기 뜻대로 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달려 있다”고까지 단언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자살을 “영혼을 더럽히는 죄”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살 예방은 곧 신의 뜻을 수호하는 일이 된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만일 절대자(神)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자살하고 말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타난다. 그만큼 신앙의 유무에 따라 삶의 의미부여가 좌우되며, 궁극적 희망이 결여된 상태의 인간은 삶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해석이다. 요약하면, 신학적 시각에서 자살을 막는 일은 개인을 위한 배려이기 이전에 신성한 질서를 지키는 문제이다.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신의 것이므로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되고, 따라서 사회가 개입해서라도 그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종교적 논리는 사회적 통제와도 맞물려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가 자살을 범죄시하거나 강력히 낙인찍은 것은 단순히 도덕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 질서의 유지와 관련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자살한 자에게 공식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홀로 매장했으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살자의 시신을 거리에 끌고 다니며 쓰레기 더미에 내던지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법령까지 발포했다. 현대에 들어와 대부분의 나라가 자살을 더 이상 범죄로 보지 않게 되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영국에서는 자살 시도가 불법이어서 재산 몰수 등 처벌이 이루어졌고 미국 일부 주에서도 자살을 중죄로 다스린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는 자살 예방 담론이 때로는 개인을 위한 연민보다는 사회 전체를 위한 질서 유지의 명분으로 작동해 왔음을 보여준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죽을 자유까지 허용하면 혼란이 온다”는 무언의 전제가 깔려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자살 예방이라는 대의명분 뒤에는 사회 공동체의 안녕과 가치 체계를 수호하려는 통제 심리가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물러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시기에 극심한 좌절과 우울을 겪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방문을 잠그고 삶을 포기하고픈 충동에 휩싸인 나는 가지고 있던 수면제 한통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바로 의식을 잃었는데, 일어나 보니 응급실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의 가족들은 나를 업고 발로 뛰어서 근처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눈을 뜨자 내게 들어온 시선은 흐느끼고 있던 가족들이었다. 충격에 얼어붙은 배우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강타당한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만약 이대로 떠나버렸다면, 이 사람들이 겪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겠구나.’ 그리고 ‘내 죽음은 결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자살은 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새겨졌다.

이 경험 이후 나는 힘들 때면 가족의 눈물을 떠올리며 끝내 스스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흥미롭게도, 이 깨달음은 앞서 철학자들이 말한 여러 이유들과 맞닿아 있다. 한편으로는 칸트적 의미에서 내가 나 자신을 함부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윤리의식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밀의 논리처럼 내 삶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한 판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솔직한 동기는 “사랑하는 이들을 더 이상 울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큰 슬픔이 될 수 있다면 함부로 저버릴 수 없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미안함이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살을 막는 중요한 보호 요인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하게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 의식 때문에 극단적 선택의 문턱에서 돌아선 이들이 적지 않다. 나의 이야기는 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자살을 고민하는 이들이 끝내 삶을 붙드는 이유를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이를 치료와 예방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샤 라인 한(Linehan)은 1983년에 ‘자살하지 않는 이유 척도’(Reasons for Living Inventory, RFL)를 개발하여, 자살 위험자들이 실제로 자살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들을 조사했다. 쉽게 말해 “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들을 수집하여 분류한 것이다.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다양한 문화권과 집단별로 사람들이 꼽는 ‘살아야 할 이유’가 정리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생존에 대한 본능과 삶에 대한 긍정적 신념: 스스로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막연하지만 “내일은 오늘과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 가족과 친구에 대한 책임감: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남겨진 가족이 받을 충격과 고통을 알기에, 또는 아직 부양해야 할 아이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기에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 사회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사회적 낙인이나 평판에 대한 두려움도 중요한 요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거나 민폐를 끼칠까 봐” 죽음을 망설이는 경우, 혹은 자신의 자살로 인해 가정이나 공동체가 받을 부정적 영향을 걱정하는 심리이다.

•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공포: 비극적 선택을 앞두고 막연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발을 돌리기도 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살에 수반되는 고통에 대한 공포 역시 사람을 살아남게 만드는 현실적 이유이다.

• 도덕적 또는 종교적 금기: “자살은 죄악”이라는 종교적 믿음이나 양심상의 꺼림칙함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는 경우이다. 특히 신앙을 가진 이들은 내세의 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교리적 금지 때문에라도 삶을 이어가려 한다.

위와 같은 ‘자살하지 않는 이유’(Reasons for Living)들은 자살 위험이 높은 사람들을 돕는 치료적 자원이 되기도 한다. 상담자나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당신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를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함으로써, 극단적 생각을 누그러뜨릴 단서를 찾는다. 예를 들어 “부모가 슬퍼할 것 같아서”, “아이가 떠올라서”와 같은 대답이 나오면, 그 관계의 끈을 강화하여 삶의 의지를 붙들어주는 식이다. 실제로 앞서 이야기한 필자의 경우처럼 유가족의 고통에 대한 예상은 강력한 자살 억제 요인으로 확인되었다.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길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염두에 둘 때, 사람들은 차마 삶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이러한 관계적 맥락은 자살 예방에 있어서 단순한 “네 목숨이 소중하니까 살아라”라는 구호보다 훨씬 현실적인 설득력을 가진다. 사람을 사람으로 붙드는 것은 추상적인 생명 존중의 명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타인에 대한 책임과 사랑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한 개인의 서사를 종합해 볼 때, 자살 예방은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명령이나 도덕적 당위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삶의 연장은 오히려 더욱 깊은 절망을 낳을 위험도 있다. 정작 삶의 당사자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찾지 못하면, 수동적인 생존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한 자살 예방은 존재론적·관계론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존재 의미와 그가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삶의 이유를 재발견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적인 의무나 종교적 교리만을 들이대며 “죽으면 죄다”, “무조건 살아라”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의미를 함께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대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가족, 누군가의 동료로서 자신이 지닌 자리매김을 느낄 때, 인간은 완전히 어둡던 삶에 한 줄기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 관계적 의미야말로 자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물론 삶의 버팀목이 반드시 고귀하거나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는 두려움 때문에 삶을 택하고, 또 어떤 이는 차마 남겨질 이들에게 미안해서 죽음을 미룬다. 그 이유가 설령 의무감이나 습관, 혹은 무의식적인 본능의 영역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그 사람을 살아 있게 한 소중한 끈이다. 희망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때로는 희망이 아닌 다른 감정들이 우리를 붙잡는다. 책임감, 미안함, 두려움, 사랑의 흔적 등은 어쩌면 희미한 불빛 같지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한 발짝 더 내딛게 하는 원동력일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물었던 것처럼, 자살 예방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되짚어 본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사자를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사회의 안녕이나 도덕의 수호를 위해 개인을 억지로 붙드는 통제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를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삶을 선택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하고, 그 섬세한 이유들에 공감하며 북돋워줄 때, 비로소 자살 예방은 공허한 구호가 아닌 살아있는 실천이 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지닌 크고 작은 ‘살아야 할 이유’들이 존중받고 강화될 때, 삶의 끈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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