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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투스를 뽐내지 않는 아비투스

내가 단단하다면,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by 에피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은연중에 드러내곤 한다. SNS에 근사한 요리 사진을 올리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며, 대화 중에 자연스레 전문 지식이나 예술적 취향을 내비치는 일상적 행위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정작 ‘진짜 품격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아비투스를 과시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몸에 밴 습관과 취향에서 품격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비투스란 무엇이고, 왜 어떤 이들은 그것을 뽐내고 또 어떤 이들은 조용히 감추는 것일까?


아비투스란 무엇인가? – 후천적 성향의 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취향과 행동 양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했다. 아비투스란 간단히 말해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소비의 근간이 되는 후천적 성향”을 뜻한다. 이는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가정환경, 교육 수준, 사회적 계급에 따라 형성된 삶의 습관이자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타고나서 고상한 취향을 지닌 것이 아니라 그가 자라온 환경과 계층이 만들어낸 문화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취향으로 나 자신을 구분 짓고 타인에게 구분되며, 이러한 문화적 취향이 곧 계급을 보여주는 지표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아비투스는 사회가 개인 안에 심어놓은 오래된 습관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세상을 보고 또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드러내고 과시한다. 가장 흔한 예는 SNS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사진과 글을 올려 사회적·문화적 자본을 뽐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 서재 한편의 문학 작품들… 이러한 포스팅은 모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나는 이런 취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사실은 나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경험 자체가 중요한 과시 수단이 된 시대라서, 남들이 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을 먼저 해보고 공유하는 것에도 열을 올린다. 예를 들어 새로운 취미나 운동에 도전하고 인증하거나, 어려운 자격증 취득 과정을 일기처럼 올리는 식이다. 이러한 자기 연출은 곧 그 사람의 아비투스를 나타내는 무대가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과시적 소비문화가 두드러진다. 값비싼 물건을 구매해 자랑하는 이른바 “플렉스(flex)” 문화가 대표적이다. 고가의 패션, 럭셔리 시계나 자동차 등을 보여주며 자신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과시하는 행태이다. 사실 이런 베블런 효과(과시 소비 현상)는 19세기 후반부터 지적된 오래된 인간 심리이다. 과시적 소비는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싼 물건과 서비스를 구매”하여 우월감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120년도 넘게 이어져 온 사회 현상이다. 오늘날에는 여기에 더해, 지식이나 교양의 과시도 흔하다. 이를테면 일부 사람들은 어려운 철학 용어를 쓰거나 클래식 음악·예술 작품에 대한 견해를 SNS나 모임에서 과장되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문화 자본을 자랑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각자가 지닌 (혹은 지니고 싶어 하는) 아비투스를 열심히 포장지 삼아 자신을 드러내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실에서 정말 자기 계층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아비투스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흔히 “진짜 부자는 티를 안 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 사례를 보면, 어느 회사에서는 외모도 수수하고 늘 검소하게 지내던 직원이 사실은 상당한 재산가 집안이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흔한 이야기다. 다른 부유한 직원은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도 굳이 회사 건물 주차장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걸어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 이야기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 내 지인이었던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자산 규모를 들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질투와 견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특히 상사나 가까운 동료가 “나와 비슷해 보이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나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에 큰 불편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돈 많은 티를 내어 주변 사람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인 지혜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배려와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신중하다. 괜히 잘난 체했다가 자칫 다른 사람의 마음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제와 배려의 미학은 북유럽의 ‘휘게(hygge)’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휘게는 덴마크어로 ‘편안하고 아늑한 삶의 방식’을 뜻하는 말로, 이들은 소박한 식사, 따뜻한 조명, 조용한 대화에서 삶의 질을 찾는다. 북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자산이 많더라도 검소한 삶을 유지하고, 겉치레보다 실질적 안락과 관계에 가치를 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며 살 것인가’이다. 이는 곧 아비투스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삶의 품격을 만들어가는 문화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해외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한 프랑스인은 “진짜 부자들은 자기 부를 감추려고 한다. 돈이 엄청 많아도 30년 된 낡은 차를 고장 날 때까지 계속 몰고 다니며, 옷도 일부러 수수하게 입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부자들이 사치를 부리다가 혁명 등의 화를 자초한 일이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조용한 부의 문화가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는 해석도 있다. 경제적 격차가 심해지는 요즘 사회에서도 괜히 우쭐댔다가 미움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을 부자들조차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아비투스를 굳이 뽐내지 않는 태도는 단지 겸손함을 넘어서, 사회적 지혜와 자신감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내 안에 확고한 정체성과 가치관이 있다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요란을 떨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확고한 정체성과 가치관이 있다면, 나는 굳이 그것을 세상에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나라는 사람의 진짜 무게는 타인의 박수나 인정 없이도 충분히 단단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요란한 드러냄은 스스로에 대한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한 사람은 말 대신 침묵을 택하고, 장식 대신 단단함을 고르며, 순간의 주목보다는 오래 남는 신뢰를 선택한다. 그러한 사람은 보여주지 않아도 보이는 사람,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람이다. 진짜 아비투스는 그런 고요 속에서, 은은하게 스며 나온다. 그리고 그런 사람 곁에서 다른 이들은 오히려 더 큰 편안함과 존중을 느낀다. 말하자면 침묵의 미학,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크게 드러나는 품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의 아비투스는 안녕하신가요?

SNS가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자기 PR 속에 살고 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내 배경, 취향,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아비투스를 뽐내지 않는 아비투스, 즉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품격의 힘을 다시금 생각해 볼 때다. 진짜 나의 가치와 매력은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나는 법이다. 나는 왜 내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가? 혹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우리가 과시 대신 성찰을 택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아비투스와 진정으로 대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조용히 내면을 돌아보며, 나만의 품격을 쌓아가는 하루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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